1956년 6월 나는 켄터키 주립대학에서 정치학과 우등생으로 졸업을 했다. 우등을 한 사실도, 마지막 학기에 전 과목에 A를 받은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졸업식 프로그램과 학장으로부터의 축하편지를 받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당시 미국 대학에서도 정치학과에는 남학생들이 대부분이고 우리 과에도 여학생은 둘 밖에 없었다. 남학생들 중에는 한국전쟁 참전 경험이 있는 학생들이 많았고, 여학생들만큼 성적에 구애받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우등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외국학생회 회장으로 피선되어 각종행사도 주관했다. 3학년 때는 미스 유럽, 미스 아세아, 미스 남미, 미스 아메리카를 선발하는 행사에서 미스 아세아 로 선발되기도 했다. 대관식 파티에서 네 대륙 여왕들이 각기 파트너와 춤추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이는 너무 먼 곳에 있었기 때문에 이 행사에 참석치 못했다. 대신 가까운 오하이오 주에서 물리학박사 학위공부를 하던 그의 형인 박윤수 씨가 와서 파트너가 되어 주었다.
켄터키 주립대학에서 정치학 학사학위 (B.A.)를 받고 여러 대학원에 장학금을 신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내가 제일 가고 싶었던 래드클리프 대학교(Radcliff College)에서 입학허가는 나왔으나, 장학금은 한 학기 성적을 본 후에나 지급하겠다는 통지가 왔다.
이 대학이 지금은 하버드 대학과 통합이 되었지만 당시는 여자들을 위한 하버드 대학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국 여대생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은 물론이다. 클린턴 정권하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메들린 올브라이트 (Madlene Albright) 장관도 그 대학에서 입학허가가 나왔으나 규모가 작은 Wellesley College를 택했다고 자서전에 쓰고 있다.
그런데 워싱턴의 아메리칸 대학교(The American University:AU) 대학원에서 상당한 액수의 장학금을 준다는 것이다. 망설임 없이 AU로 결정을 했다. 경제적으로 편하게 지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약혼자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요건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한국을 떠난 지 4년 만에 겨우 같은 도시에 있게 되었다. 양가에서는 또 다시 걱정이 태산이었다. 약혼 남녀가 같은 도시에서 살게 되면 학업에 지장이 있을 것을 염려한 것이다.
나는 YMCA에 유숙하면서 AU 대학원에 다니고 그이는 자치 방을 얻어서 조지타운 외교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조지타운 외교대학은 정장을 하지 않으면 강의실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늘 단벌신사에, 꼭 같은 넥타이를 매고 다녀야 했다. 빌 클린턴의 회고록 My Life를 보면 자기가 다니던 마지막 해부터 정장을 안 해도 되었다고 써 있다.
나는 학교에서 그런대로 넉넉한 장학금이 나왔다. 그이는 후원자인 스콧 (Scott) 사장이 학비와 경비를 조달해주어 학업에 전념할 수가 있었다. 자연히 학교수업이 끝나면 늘 붙어 다니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고, 밤이면 그이가 내 숙소로 데려다 주었다.
한 학기를 마치고 난 1957년 초, 우리는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낭비가 된다는 구실로 결혼을 하기로 결정하고 양가에 말씀드렸다. 우리 집에서는 결혼하면 박사학위는 힘들 것이라고 아쉬워했지만 승낙을 해주었다. 내가 미국으로 떠난 후 그이가 우리 집에 자주 놀러가 어머니의 신뢰를 얻은 것 같았다.
또 집에서는 내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만큼 신용을 얻은 막내였기 때문에 “범준이가 좋아하는 사람이면 틀림이 없는 사람일 것”이라고 믿었다고 말씀해 주셨다. 시댁에서도 아버지가 안 계신 것을 아쉬워하긴 했지만 아들의 결심이 단호해 그 이상 반대는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1957년 4월 14일(토)로 결혼 날짜를 잡았다. 운명의 만남 이후 7년, 한국을 떠난 지 5년 만에 우리는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여러 면에서 대조적인 가정배경에서 성장한 남녀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