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주사약을 맞을 때는 하루 종일 걸리고, 한 가지만 맞을 때는 점심시간 넘어서 끝이 난다. 병동에 따라서 독방에서 주사를 맞을 때도 있고 한방에서 환자 두 사람이 주사를 맞을 때도 있다.
한국에서는 4, 5일씩 입원을 하는데 비해 미국에서는 하루에 주사가 끝이 난다. 주사를 맞기 전에 조프란(zofran)이라는 지토제를 주사하고 설사방지를 위해서 아트로핀 (atropin)이라는 주사도 맞는다. 주사를 맞는 동안 눈을 감고 메스꺼움을 진정시키려고 애쓰고 있는 그이 모습을 지켜보는 일도 형벌과 같았다. 그러다가 잠이 들면 나는 갖고 간 책을 읽으며 주사약이 떨어지는 속도를 지켜보았다.
우리 곁에서 항암주사를 맞았던 미국여성은 플로리다 주에서 온 임파암 환자였다. 흔히 볼 수 있는 암환자들과는 달리 명랑하고 간호사들과 농담까지 하면서 지루한 시간을 메워갔다.
이 병원에는 세계 각 국가에서 암환자들이 모여드는데 몸을 휘감고 머리까지 뒤집어쓴 중동 여성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외국에서 온 환자들과 가족들의 굳은 표정에 비해 미국 환자들과 가족들의 표정은 신기하게도 밝았다.
두 번째 사이클이 시작되면서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암 센터에 가면 환자가 거의 모두 모자를 쓰고 다닌다. 머리카락이 빠져서 모자를 썼구나 하는 정도로 그들을 바라보았으나 막상 남편의 머리카락이 매일 아침 베갯잇에 한 움큼 씩 빠져있는 것을 볼 때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이가 너무 가엾어서 소리 없이 울었다. 그이는 별 내색을 하지 않고, 외출할 때는 임 총영사가 선물한 텍사스 로고가 들어있는 모자를 쓰고 다녔다. 다행히 모자를 쓴 그의 모습도 멋있게 보였다.
휴스턴에 간지 6개월이 되는 어느 날 주치의가 워낙 말기에 발견된 암이어서 휴식기간 없이 매주 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날도 저녁 식사 후 호숫가를 손잡고 걸었다. 그이는 “죽을 때까지 매주 주사를 맞으며 살고 싶지 않다” “나로 인해서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싶지 않다” “어느 정도 치료를 받다가 희망이 안 보이면 이곳에서 철수하고 한국에 가서 죽겠다”고 비장한 각오를 한 사람같이 자기의 계획을 조용히 설명했다.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면서 나 역시 계획을 말했다. “한국의 아파트를 처분하고 휴스턴으로 생활의 근거지를 옮깁시다” “그리고 계속 새로 나오는 항암약을 쓰면서 시간을 벌면 언젠가 획기적인 약이 나올 것이다”고 주장했다. 그이는 “비현실적인 말”이라며 완강히 반대했다.
한편 대구의 전 사장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한국으로 돌아간 최상현 씨 부인이 전해주었다. 암환자 가족에게는 다른 암환자의 사망 소식이 절망감과 공포심을 안겨 준다. 그이에게 알리지 않았다.
김선길 장관 내외는 조지아 주의 따님 댁에 올 때나 친구들과 크루즈를 할 때나 서울에서 가끔 전화를 해서 그이에게 조크를 말해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김 장관과 통화를 할 때면 우울하던 그이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끊은 후 나에게 말해주면 덜 괴로울 때이고 아무 말 없이 침대로 가서 누우면 괴롭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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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선길 전 해수부 장관 [출처 ; imbc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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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김 장관과 그이는 만나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웃어대는 그런 사이로 두 사람 모두 목소리가 커서 한자리에 모이면 시끌버끌 했는데 그이가 병이 난 후부터는 그런 음향효과는 끝이 나고 말았다.
항암치료의 사이클을 거듭하면서 8월 말에 가서는 CEA가 5.3 (정상인의 치수: 5~10)으로 줄었다며, 몇 프로 안 되는 성공케이스라고 했다. 그러니 6주간 휴가를 할 수 있다고 한국에 다녀오라고 했다.
내 귀를 의심했다. 갑자기 내 몸이 솜같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 생각을 못했기 때문이었다. 좋으면서도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병 같은 생각이 들어서 내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좋았다가, 불안하다가, 알다가도 모를 내 마음이었다.
서울행: 10개월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There is no place like home’이라는 노래가 절로 나왔다. 다만 우리보다 먼저 귀국한 두 암 환자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에 우울했지만….
오랜만에 부모님과 성연이 산소에도 다녀왔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남은 자식에게 부담을 주지 말고, 죽은 후 화장을 해서 성연이 산소에 뿌리자는 데 합의했다. 원래 나는 화장은 두 번 죽는 것 같은 생각에 싫어했으나 막상 부모님 산소에 때마다 찾아뵙는 일도 그리 쉽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화장을 주장한 남편 의견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영인문학관 전시회에도 우리가 나란히 참석해서 오랜만에 반가운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만나는 분들마다 그이의 건강이 좋아졌으니 얼마나 기쁘냐는 인사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 불안하고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암세포가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여간 남편이 환자라는 사실을 잠시 잊기도 했다. 그때부터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한번만 완치의 기적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여생을 간증하며 살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다시 휴스턴으로: 서울에서 한 달반의 휴식을 마치고, 10월 14일 다시 휴스턴으로 돌아갔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9・11 테러 이후 비행장에서의 검문 검색이 무척 까다로워졌다.
도착하자마자 다음 날 피검사를 했고 결과는 CEA가 5.3에서 200으로 올라 있었다. 역시 주사를 맞지 않아서였다. 나는 한만청 박사의 ⌜암과 싸우지 말라, 친구가 되라⌟를 인용하면서 피검사 치수에 일비일희하지 말자고 태연한 표정으로 그이를 위로했으나 마음 한 구석에는 어두움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두 주일 더 항암주사를 맞은 후의 피검사 결과 CEA 수치가 200에서 100으로 줄어서 다시 기운을 차리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