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1학기 때였다. 밤 10시 기숙사 로비에서 모두 모여 사감 선생님과 회의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Marian Lee, long distance call! (메이란, 장거리 전화)" 이라고 크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때 Marian 이라는 미국 이름을 쓰고 있었다. 부산에서 사귈 때, 영국의 유명한 디스라엘리(Disraeli)수상의 부인 이름을 따서 그이가 지어준 것이다. 그이는 어릴 때 유명인들의 자서전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이름을 많이 알고 있었다.
전화를 받아보니 그이였다.
“이번 겨울 방학 때 약혼하자. 오하이요(Ohio)주의 아덴스(Athens)에서 세계기독학생회가 개최되는데, 한국학생들이 많이 참석한대. 강원용 목사님도 오신다니까 거기에서 약혼식을 갖는 거야.”
“부모님 허락을 맡지도 않고?”
“허락하실 거야. 약혼반지도 다 사 놓았으니까 그리 알고 계획을 세워봐.”
너무 의외의 제의여서 놀란 나는 할 말을 잊고 있는데 그는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차피 결혼할 사이라면 목사님도 오신다니 약혼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과, 공부를 마칠 수 없을까봐 걱정하시는 어머니 얼굴이 자꾸만 겹쳐져 마음을 다잡기가 어렵고 불안했다. 방학 때까지는 시간이 있어 우선 집에 편지를 보냈다.
예상대로 아직 약혼시기가 아니라는 단호한 반대 편지를 받았다. 어른들이 반대하는 데는 당연한 이유가 있기에 일단 워싱턴에 가서 약혼을 미루자고 설득하고 국제회의에나 참석하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12월 방학이 되어 워싱턴으로 갔더니 그 이도 집에서 반대 편지가 왔다고 했다. 오하이오 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약혼을 졸업할 때까지 미루자고 졸라댔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정해놓은 그는 생각을 바꿀 기색이 전혀 안보였다. 어머니와 오빠를 거역하는 일이 겁이 나서 나는 그만 울어버렸다. 그는 자기 부모님은 걱정 말고, 모든 것을 자기에게 맡기라고 나를 달랬다. 미리 다 준비를 해놓았으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고 계속 설득하다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도 고집이 있는 편인데 모든 것이 운명인지 이상하게도 그이가 하자는 데로 끌려가게 되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수십 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미국 각처에서 회의에 참석하러 모여들었다. 대부분 아는 학생들이었다. 한배호 씨 (고대 교수), 정희경 씨(성대 교수, 국회의원), 김정세 씨(서강대 교수), 이태성 씨(오리온 사장), 박종기 씨(인하대 교수) 등 모두 원대한 꿈을 안고 유학시절을 보내던 때였다.
결국 우리는 많은 친구들의 축복을 받으며 강원용 목사님의 인도로 약혼식을 올렸다. 물론 가난한 유학생이어서 과일 펀치와 다과 정도만 준비했다. 지금도 정희경 의원은 “그때 나도 부엌에서 준비하느라고 바빴어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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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년 강원용 목사님 앞에서 약혼식 / 오하이주 아덴스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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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당시 미국에 온 유학생들은 우리가 약혼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이는 이벤트를 만드는 데는 당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10대 때부터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내성적인 나는 그의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에 끌렸는지 모른다. 덕분에 우리의 약혼은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약혼 기념으로 5부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았다. 당시 고학생 신분으로는 그만한 다이아몬드 반지란 꿈도 못 꿀 때였다. 돈이 어디서 생겼느냐고 걱정했더니 다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 대사관의 송광정 참사관(후에 여러 국가 대사로 활약)께서 면세로 살 수 있게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 반지 값은 결혼 후에야 다 갚을 수가 있었지만, 그 반지를 끼고 렉싱톤으로 돌아갔더니 기숙사 친구들이 모두 부럽다며 축하를 해주었다.
어느 날 저녁 늘 그렇듯이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10시 정각에 기숙사로 돌아왔다. 누구나 10시까지는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같은 방을 쓰는 친구가 잠깐 할 이야기가 있다고 부르더니 나를 목욕탕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기다리고 있던 여러 미국 친구들이 갑자기 나를 번쩍 들어서 목욕탕 속으로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입고 있던 내 청바지와 윗도리가 다 젖고 말았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졸업 전에 약혼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벌칙이라고 했다. 그날 모두 재미있게 떠들며 그의 미국 이름인 Joe에 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는 미국에서 Joseph Park으로 통했다. 어머님께서 성경에 나오는 요셉을 아드님의 세례명으로 지어주셨다고 했다. 기숙사 친구들은 이미 나의 보이 프렌드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 시절 남자친구가 생기면 싸인이 들어있는 사진을 방에 걸어놓는 것이 유행이었다(미국학생들은 남자 친구사진이 자주 바뀐다).
나도 그이가 ‘My dearest, Love is eternal, Your Joseph (사랑은 영원하다)’ 라고 싸인 한 사진을 책상 위에 놓았다. 나도 ‘Thinking of you, Love, from your Marian (당신을 생각하면서)'이라고 쓴 사진을 보내 주었다. 지금 그 두 사진을 두 개짜리 액자에 끼워서 응접실에 놓고 있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미지의 세계를 꿈꾸며 두 사람만의 순수한 사랑에 취해 있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을 회상하며 나는 추억에 젖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