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도착한지 2년이 되는 여름방학에 우리는 시카고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이는 한배호 씨, 전영철 씨, 양준철 씨와 함께 시카고에서 각각 일을 하면서 강원용 목사님, 전옥숙 그리고 내가 그곳으로 합류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미시간 주의 여름캠프를 끝내고 켄터키로 돌아가는 길에 그 곳으로 갔다. 부산에서 헤어진 후 2년 만에 이루어진 꿈같은 해후였다.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가는 길에 그는 “우리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기뻐하며 나를 쳐다보더니 “이상하다. 코가 작아진 것 같네”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에 살이 붙어서였을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마셔본 코크(한국에서는 콜라)를 아주 좋아했다. 기계에 5전만 넣으면 유리병에 담긴 콜라가 나와 하루에도 수없이 마셔댔다. 체중은 점점 늘고 얼굴에도 살이 붙으니 코가 작아 보였던 것 같다. 어쩌면 코 큰 사람들만 보다가 나를 보니 더 작아보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시카고로 갈 때까지 그는 시카고의 식당에서 햄버거나 샌드위치를 만드는 일을 했다. 그렇게 번 돈을 나와의 데이트 자금으로 다 써버려 캘리포니아로 돌아갈 여비가 모자랐다. 할 수 없이 같은 지역에서 공부하고 있던 전영철 씨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보내야 할 자동차를 운전해 주는 것으로 여비를 조달했다. 두 사람은 호텔 비를 절약하기 위해 교대로 밤에 운전하고 낮에는 나무 그늘에서 잠을 잤다. 음식은 깡통 스파게티 등을 사서 먹으며 3일간 운전했다. 그래도 기름값이 모자라서 주유소에 시계를 맡겼다가 대학에 돌아간 후 돈을 보내 찾았다고 하니 데이트 댓가 치곤 너무 고된 여행이 아니었을까?
그 해 겨울방학, 그는 워싱턴에서 가까운 볼티모어에 가서 1주일을 보냈다. 코이노니아 재단의 후원으로 그가 한국에서부터 속해있던 Student Cultural Club (SCC) 회원들의 모임이 있었다. 여비는 교회부인회와 로터리클럽에서 마련해 주었다. 그는 그곳으로 가는 도중, 내가 있던 켄터키까지 3일간이나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들렸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방학이 되면 돈을 벌어야 했다. 나 역시 학교에서 보내주는 캠프나 세미나 참석이 아니면 아르바이트를 하며 밖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방학 때는 기숙사가 문을 닫기 때문이다. 그 해에는 밀러(Miller)목사님 댁에서 어린 두 딸을 봐주고 사모님을 도와주면서 지내고 있었다. 그때 ‘보이 프랜드’가 방문한다고 하니까 목사님은 식사 대접도 해주고 극진히 그이를 환영해 주어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때 다섯 살이었던 목사님 따님이 현재 워싱턴의 Smithsonian Institute 고위직에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근년에 알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외교학으로 명성 높은 워싱톤 D.C.의 죠지타운 대학교(Georgetown University)로, 나는 모헤드를 떠나 렉싱톤(Lexington)에 있는 켄터키주립 대학교(University of Kentucky)로 각각 전학을 했다. 학부부터 공부하는 유학생으로서는 작은 캠퍼스 타운에서 어느 정도 미국문화에 익숙해진 후 큰 대학으로 옮기는 것이 보다 현명한 일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는 워싱톤으로 가는 길에 내가 전학 간 렉싱톤에 들러 졸업 후의 계획에 대해 의논했다. 그이는 내가 대학원은 가급적 워싱턴에 있는 대학으로 결정하기를 원했다.
그가 며칠 머무는 동안 켄터키 대학원에 다니고 있던 노신영 씨 (전 총리), 지금은 고인이 된 이춘성 씨(전 공보부 차관), 이덕수씨 (전 세계은행 이사)도 만났다. 그는 이춘성 대사가 머무는 숙소에서 지냈다. 그가 워싱턴으로 떠난 후 이 대사는 “좋은 사람 같아 보이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라고 충고를 해주었다. 우리 사이가 얼마나 깊은 관계인지 모르고 늘 공부만 하고 데이트 한번 안하는 순진한 여대생이 남자에게 속지나 않을까 염려되었던 모양이다.
그는 워싱턴에서 김정세 (전 서강대 교수), 조윤형 (전 국회의원) 씨와 셋이서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내가 워싱턴으로 옮긴 후 그의 자취집에 갔더니 자기가 만든 야채 수프를 자랑했는데 제법 맛이 있었다. 큰 냄비에 소고기 덩어리, 당근, 감자, 셀러리, 양파, 마늘, 소금을 넣고 푹 끓이면 된다고 기숙사 생활만 한 나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이와 김 교수가 번갈아 요리하고 조 의원이 설거지를 맡았다고 한다. 요리와 설거지는 여자만의 특권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한국의 남자들 역시 닥치면 못할 일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당시 유학생들은 공부하랴, 돈 벌랴 무척 힘들게 지냈다. 어느 날 밤 그이가 조지타운가 하숙집 앞에 서 있을 때였다. 마침 그 옆의 전신주 등불 아래서 어느 동양 남자가 턱시도를 입은 채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돈을 꺼내서 주섬주섬 세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는 선배(귀국 후 모 대학 정치학 교수가 되었다)였는데 그 날 밤 연회장에서 칵테일을 나르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받은 팁을 세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세대는 택시기사로, 식당 웨이터로, 베이비시터로 온갖 힘든 일을 가리지 않고 뛰며 학업을 마쳐야 했다. 그이 역시 줄곧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그러면서도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유학생회를 조직했듯이 워싱턴에서도 한인유학생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으로 활동했다. 워싱턴 한인유학생회는 그 후 선거에서 경기 출신과 비 경기 출신으로 나뉘어져 초대회장 이후 숫적으로 우세한 비경기 출신들이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