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한 우리의 활동 (7회)

우리 둘은 여러 면에서 같은 경험을 했다. 일하며 공부하는 것도 같았고, 외국학생회 회장으로 활동한 경험도 같았다. 또 당시 한국전쟁의 참상을 널리 알려 원조를 모금하는 행사들이 지역마다 있었는데 우리는 용돈도 벌 겸 각종 모임에 참석해, 한국이 전쟁으로 얼마나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가를 이야기하고 다녔다. 그러다 보면 참상이 과장되기도 했으나 어쨌든 그 일은 가난한 고국으로 보내는 원조금을 모금하는 일이니 보람도 있었고, 용돈도 5-10달러씩 받으니, 일거양득이었다. 그래서 어떤 모임에도 부르기만 하면 달려가곤 했다.

그 와중에 그이가 겪은 웃지 못 할 일화가 있다. 하루는 연설을 마치자 어느 중년 남자가 손을 들더니 질문 아닌 힐책을 했다. 모두 그렇게 헐벗고 굶주린다며 “너는 어째서 얼굴이 부옇게 살이 쪘느냐”고 하더라는 것이다. 순간 당황했지만 그는 기지를 발휘했다. “우리가 못 먹어서 다 말라야 한다면 잘 먹는 당신들은 다 뚱뚱해야 할 텐데 왜 마르고 가는 사람들도 있느냐”고 반박했더니 모두들 웃었다고 한다.

첫 여름방학을 맞이했을 때 그는 일자리를 부탁하기 위해 그의 재정보증인이 사는 샌디에고(San Diego)로 갔다. 스콧(Scott) 사장은 그곳에서 큰 백화점을 두 개나 운영하는 백만장자였다. 소개받은 백화점의 인사과장이 타자를 칠 줄 아느냐고 물었다. 한국식으로 겸손하게 “잘 하는 편이 아니다”라고 대답을 했더니 수동 엘리베이터를 운전하는 일이 맡겨졌다.

그의 타자솜씨는 그때 이미 수준급이었지만, 문화의 차이는 그를 엘리베이터 운전수로 만든 셈이었다. 미국아이들은 조금만 할 수 있어도 “할 줄 안다”고 말한다. 그에 비해 우리는 아주 능숙하지 않는 한 “조금 밖에 못 한다”고 대답을 한다. 그들은 액면 그대로 받아드리는 것이다.

1950년대 미국의 백화점 엘리베이터는 모두 수동으로 작동을 했다. 대개 낮에는 부유층 할머니들이 한가하게 시간도 보낼 겸 구경삼아 백화점을 찾는다. 그이가 잘하려 해도 엘리베이터는 때로는 조금 더 올라가거나, 때로는 조금 못 미쳐서 정확한 위치에 대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면 할머니들이 눈을 흘기며 불평을 했다. 하루 종일 신경 쓰면서 일을 하고나면 힘이 들어서 세상이 다 빙빙 돌아가는 것 같았다. 기숙사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옷도 못 벗고 쓰러져 잠만 잤다. 한 밤에 잠에서 깨면 배가 고파서 괴로웠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 유학 시절의 이범준

일주일 만에 그 자리를 그만두고 한인교포들이 경영하는 켈리포니아 주의 리들리(Reedley)라는 농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하루 종일 낮에는 복숭아를 따고 밤에는 포장을 하는 일이었다. 시간당 1달러였다. 새벽 4시면 수많은 고학생들이 눈을 비비며, 때로는 줄줄 흐르는 코피를 닦으면서 농장으로 향했다. 고된 생활이었지만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다고 한다. 그때 함께 합숙하며 동고동락한 윤영교 박사, 이영근 박사 등 다른 유학생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그는 늘 궁금해 했다.

1954년 봄, 그이는 남가주 한인유학생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자세한 내용은 기억할 수 없으나 당시 L.A. 지역 교포사회는 반정부파인 흥사단과 국민회의, 친정부파인 동지회와 진필식 영사로 분열이 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그이는 회장 역할 수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예를 들면 고국으로부터 리틀 엔절스 어린이 합창단이 공연차 왔을 때도 제각기 축사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회장 재량으로 정치단체는 제외시키고 진필식 영사의 축사만 프로그램에 넣었다가 무척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그가 초대 한인학생회 회장으로 여러 방면에서 활약이 크다보니 교포 중에는 사윗감으로 점을 찍고 접근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우리의 사랑과 믿음이 약했다면, 그때 아마도 헤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열심히 편지를 교환하면서 사랑을 확인하고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달랬다.

결혼 후 둘이 주고받은 편지들을 모아보니 큰 박스로 두 개나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이의 편지는 감성적이고 로맨틱한 내용이 대부분인데, 내 편지는 이성적이고 훈육주임 같은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남자가 여자보다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데다 걱정이 되니까 ‘해서는 안 될 일’, ‘해야 할 일’들을 상세히 적어 보냈던 것 같다. 감정표현을 쑥스러워 했던 나는 주로 남의 시를 그이에게 보내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런 차이 때문이었을까? 강원용 목사님께 우리가 결혼을 전제로 교제를 한다고 말씀드렸을 때였다. 목사님은 그이에게 “범준이는 꿈이 큰 아이라 쉽게 승낙을 안 할 것이고, 정서면에서도 너와는 안 맞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고, 나에게도󰡒너와는 맞지 않은 것 같다”며 별로 탐탁하지 않은 반응을 보이셨다. 그 이는 “사람들은 나만큼 범준이를 몰라서 우리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라며 신경 쓰지 말자고 했다. 양가의 반대와 목사님의 부정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와 나는 계획대로 일을 진행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