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1960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대남공작의 방향을 적극적인 무력전술(武力戰術)과 납치로 전환하면서 남북 대립이 한층 격렬해졌다. 1968년 1월김신조(金新朝)의 124군(軍) 부대 침투를 신호탄으로 11월 울진, 삼척 지구에 100여명에 달하는 무장게릴라의 투입, 5~6월 사이에 동해, 서해에서 조업 중인 38척의 우리 어선과 어부 288명의 납치 그리고 7, 8월의 임자도 간첩단 사건과 서귀포간첩선 파견 등 침투, 교란이 계속 확대되어 갔다.
그리고 대미(對美) 도전도 과감했다. 1968년 1월에 정보수집선 「푸에블로」호(號) 피랍 그리고 68년 4월에 미국 정보기 EC121기(機)의 동해상 피격추락 등으로 이어지다가 드디어 1969년 12월 11일 북한 간첩에 의한 KAL 여객기의 공중납치 사건이 터졌다.
51명의 승객과 승무원이 탑승한 강릉발 서울행 KAL기(機) YS 11A(일본제 쌍발 여객기)를 대관령 상공에서 납치해 함경남도 대포리(大浦里) 군(軍) 비행장으로 끌고 갔다.
우리 형님 김진규(金秦圭)는 이 항공기에 탑승했고, 이듬해 2월 14일 그중 39명과 함께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악전고투를 했다.
형(兄)은 체신부 감사(監査)팀의 일원으로 강릉우체국, 전화국, 전화건설국 등 3개 산하기관의 정규 연말감사를 위해 항공편(航空便)으로 강릉으로 출장을 갔다. 1주일 예정이었고, 일요일이 끼어 있어 사냥총까지 휴대하고 가셨던 모양이다. 수렵협회가 알아주는 명포수로 겨울에는 사냥으로 소일을 했고, 수렵견 「포인터」도 집에서 서너 마리 키우고 있었다. 다행히 이번 여행에는 사냥개를 동반하지 않았다.
일주일간의 감사(監査)를 무사히 마치고 오후 KAL기(機)에 일행과 함께 탑승했다. 이륙을 하고 잠시 눈을 감고 쉬고 있는데 낌새가 이상했다. 여객실 캐빈에는 전혀 동요가 없었는데, 이륙 후 약 10여분 만에 약간 기체가 흔들리더니 전투기가 출현했다.
KAL기 옆으로 바짝 다가온 전투기는 북한의 항공 표시가 선명했고, 건너편에서도 “적기야!” 소리와 함께 또 다른 북한 전투기가 나란히 날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기내에서는 소란이 벌어졌다. 소리소리 지르는 아비규환이 시작되었다.
형은 꿈결 같은 착각 속에서, 이때 정신을 차려야지 하고, 우선 신분을 축소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먼저 지갑을 꺼내서 「비밀취급허가증」부터 없애기로 했다. 입에다 넣고 씹으니 놀란 처지에 침이 말라 도대체 증명이 씹히지 않는다. 급한 김에 선물 받은 강릉 곶감과 마른오징어를 같이 입에 넣고 씹어보니 분쇄가 되더란다.
얼마 후 군용기가 드문드문 보이는 공항에 불시착했다. 곧바로 무장한 인민군의 트럭이 달라붙으며 비행기가 멈추자 무장군인들이 기내에 곧 들이닥치고 손들어, 하며 소리소리 지르더란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함흥 근처의 대포리라고 하는 군용 비행장이었다.
그리고 주동한 납치자는 「조창호」라는 고정간첩인데, 단신으로 권총을 들고 이륙 직후 조종실에 침입해 기수를 북으로 돌리도록 위협했다고 한다. 승객들은 인민군 전투기가 요격할 때까지 거의 납북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항공기지 사무실 같은 곳으로 연행되고, 개인별로 간단한 신분 확인과 심문을 받고 야간열차 편으로 어디론가 끌려갔다. 약 열일곱 시간을 달려 새벽에 도착한 데가 평양이라고 했다. 초대소 같은 곳에 분산 수용되고, 1인 1실로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본격적인 심문 조사가 시작되었다.
신상명세서를 작성해 제출했는데 xx동 509라고 적어 냈더니, “김선생! 509에 509-1에서 509-5까지 있는데 몇 호입니까” 하고 묻더라는 것이다. 서울의 번지, 주소를 환하게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남한은 개방사회이기 때문에 지적도, 요인들의 주소, 전화번호는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남한의 더 세세한 자료들을 완비하고 있다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하루가 지나가 이제는 우리 집안 가계부(家系簿)를 들고 왔다. 아버지는 국회의원, 동생은 남반부 괴뢰정부 수상실(국무총리실) 고위비서관으로 근무하고 있고, 미국 유학에 책까지 출판했다는 사실까지 언급하는 데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다.
형님을 거물급 인물로 단정하고 본격적인 취조가 시작됐다. 신분이 확실하고 대수롭지 않은 피랍인(被拉人)은 약 2, 3일 후에 자유롭게 놔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형은 간혹 잠도 재우지 않고 천장에 불을 환하게 켜놓은 채 고통을 주었다. 그리고 참지 못할 일은 심문하는 조사관이 수시로 바뀌는데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하니 나중에는 아주 돌아버리겠더란다.
그런데 북쪽 입장에서는 형님을 충분히 의심할 거리가 적지 않았다. 우선 신분증에 체신부에 근무하는 주사급(主事級)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동생보다 훨씬 아래 직급인지라 위장이라는 것이다. 또한 체신부 주사 정도가 엽총을 소지하고 다닌다는 것은 북쪽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완전히 고위급 기관요원(機關要員)으로 점을 찍고, 엄청난 고초를 가하면서 심문했다. 수상실의 동생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해라, 근무하는 진짜 기관을 정직하게 대라는 등 조사가 이어졌고, 간간이 창피를 주면서 구타까지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밤중에는 옆방에서 고문하는 소리와 단말마의 외치는 소리 등이 들려오면서 극도의 공포를 조성했다고 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옆방의 고문소리는 위장이었으며 일행 중 형님을 포함해 체신부 감사단장, 지방지기자(記者) 등 몇몇 공적기관 출신에게는 약 2주 가까운 조사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기타 사람들은 낮에는 관광을 시키거나, 밤에는 사회주의 혁명에 관계되는 책자를 나눠주고 독후감을 쓰라 하던가, 또는 남한의 부당한 생활에 관한 반성문을 쓰게 하면서 소일을 시켰다고 한다. 결코 조용히 휴식을 취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형님에게 한 가지 다행한 것은 학생시절 참여했던 학련(學聯)과 6.25때 병력관계로 경찰 특수계에 근무한 경력관계가 노출되지 않아 안도했다고 한다. 교사출신으로 일하다, 사변 후 가업이나 다름없는 체신행정에 투신했으며, 원가계산이 전문이라고 정직하게 말했다. 그러나 곧이듣지를 않다가 원가계산이 무엇이냐 물어 전화기를 비롯한 모든 통신기기, 우편용품 등을 제작하는 데 밑천 돈이 얼마나 드느냐 하는 것을 계산하는 직종이라고 했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