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실 근무를 시작한 지도 어언 9개년(個年)에 접어들었다. 정무실(政務室) 한 자리에서 3급 乙로 시작하여 3급 甲 그리고 1966년 2급 乙로 진급하였다. 별정직으로 한 부서에서 3단계 진급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 한다. 대개 별정직 비서관이란 모시는 분이 퇴임하게 되면 같이 그만두는 것이 십상이기 때문이다.
33세(歲)에 국장급(局長級)이 된 나는 주변에도 미안하고, 빨리 핀 꽃이 빨리 진다는 세간의 말로 걱정을 했다. 듣고 계시던 아버님은 “벼슬은 젊어서 해야 성취감이 있는 것이다.”, “일 많이 하면 되지.” 하시며 일본 총리대신을 지냈던 이누가이(犬養)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이누가이」가 총리에 취임하면서 갓 대학을 졸업한 풋내기아들을 수석비서관 칙임관(勅任官 : 천황이 임명하는 자리)에 임명한 것이다. 공직사회에서 비난이 쏟아지고 의회에서도 말썽이 나자 이누가이 총리 왈, ‘비서관이란 나의 비밀을 잘 지키고 나의 마음을 잘 읽으면 충분하다. 경력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하고 정면으로 몰아붙이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1970년 10월 17일 홍조근정훈장(紅條勤政勳章)도 받았다. 고교동창들이 어떻게 알았는지(아마도 총무처 인사국장 하던 송영언(宋榮彦) 군이 연락을 한 모양이다), 10여명이 모여 광화문 뒷골목 어느 술집에서 조촐한 축하 모임도 가졌다. 공직생활은 이제 나의 Career가 되었다. 곧 불혹의 나이 四十이 눈앞에 보이는데 이제라도 일반부처에 나가 본격적인 정규 공무원생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급했다시피 자신이 노력해 타(他) 부처 전출을 시도하지 않는 한, 정(丁) 총리 내각에서는 방법이 없었다. 총리실에서 유일하게 타(他) 부처에 나간 분이 있다면 조성옥(趙成鈺 : 나중에 문교부차관) 씨가 문교부 체육국장으로 나간 건(件)이다. 당시 조(趙) 국장은 일반직 신분이기 때문에 바로 전출할 수 있었다.
나는 일반부처에 나가기를 염원했으나 별정직이기 때문에 일반직으로 전환하려면 전형(銓衡)을 거쳐야 하고 임명제청(任命提請)을 해야 하는 수순(手順)을 밟아야 한다. 당시 공무원들의 기득권 보호가 철저했다. 이런 수속절차를 제대로 밟으려면 최소 2~3개월이 소요된다. 그때까지 그 바쁜 국장 자리를 나를 위해 비워둘 부처(部處)는 아무데도 없다.
이런 일이 있었다. 나의 고향선배 김보현(金甫鉉) 씨가 농림부 장관으로 있을 때 마침 직제(職制)개편으로 농업통계국장(農業統計局長) 자리가 하나 생기게 되었다. 친분도 있고 해서 부탁을 하러 갔더니 오히려 혹을 붙이고 돌아오는 격이 되었다.
오랜 세월 투쟁해서 농림부에 2급(級) 자리 하나 더 마련했는데 본부(本府) 그리고 농림부 산하 각 기관의 과장급 수십 명이 지금 줄을 서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다 얼마 전 청와대에서 농업진흥청(農業振興廳) 국장 자리를 하나 차지하는 바람에 장관이 그것을 막지 못하고 외부 인사에게 자리를 내주었다고 내부 저항이 대단했다고 한다.
오히려 자기를 도와 달라고 호소 아닌 부탁이 튀어 나온다. 고위직 인사(人事)란 이런 것이었다. 정부 차원의 대대적인 개편 때가 아니면 타 부처 전출이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마침 새로 조직되어 출범한 과학기술처(科學技術處)의 김기형(金基衡) 장관이 박(朴) 정무비서관을 찾아 왔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과기처(科技處)의 인원충당 문제가 화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KIST의 해외과학자 유치도 문제지만 과기처 자체의 좋은 인재 유치도 힘들 뿐 아니라 농학(農學) 분야에서는 많은 지원자가 있는 반면 공학(工學) 분야에서는 거의 없는 분야별로 많은 차이가 있는 애로를 이야기한 모양이다.
이에 박(朴) 수석은 나를 추천했다. Lafayette, Lehigh 등 공대(工大)로 유명한 학교 출신이라 인문사회(人文社會) 출신이지만 자연과학에 관한 이해(理解)가 있는 것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김(金) 장관도 Pennsylvania State에서 학위(學位)를 했기 때문에 같은 주(州) 내에 인근하여 있는 위 두 학교를 잘 알고 있었다.
총리의 허락이 났고, 전형(銓衡)에 신청을 해 놓았다. 시험은 헌법, 행정학, 행정법 그리고 경제학이었다. 한 과목이라도 과락(科落)이면 1개월 후에 재시험을 치루든지 아니면 포기해야 한다. 쓸 만한 사람으로 알고 유치했는데 전형시험에서 떨어졌다 하면 체면이 무엇이 되겠는가? 참말로 딱한 일이었다. 단독시험이라도 치르도록 총무처(總務處)에서 허락해 주면 좋으련만!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시험이고 5급(級) 주사(主事)에서 3~5배수(倍數) 추천으로 3을(乙) 승진시험을 보는 전국 수많은 공무원과 같이 어울려 보는 시험이라 예외가 없는 모양이었다. 체면상 단번에 합격해야 하고 임관제청(任官提請)을 하게 되면 최소한 한 달 반이 걸린다.
마음 단단히 먹고 시험준비에 돌입했다. 1971년 복중(伏中)이라 덥기도 했다. 다행히 총리실은 새로 복구가 끝난 돌집 중앙청 3층에 자리하고, 정부기관 중에서는 유일하게 제대로 냉방이 되어 있었다.
비어 있는 총리 보좌관실 한쪽 귀퉁이를 빌어 아침 일찍부터 퇴근 시간까지 4개 과목을 번갈아 집중적으로 파고 들었다. 평생 동안 대학시험을 비롯해 그 많은 시험을 다 치렀지만 승진시험 준비가 왜 이다지도 힘이 드는지.
낮에는 중앙청에서, 밤에는 집에서, 약 40여일을 파고들었다. 다행이 0:1의 경쟁인지라 과락(科落) 없이 무난히 통과되어 과기처(科技處) 연구조정실(硏究調整室)로 가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