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崔) 총리가 주로 하신 일은 국회에 출석하시는 것이었다. 총리께서는 괄괄한 야당 의원(議員)들을 순하게 만드는 각별한 재주를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중앙중학교 교장, 신문사 사장을 오래 하신 분으로 국회 내에는 제자도 많아서 총리(總理)라는 관칭(官稱) 보다는 선생님으로 통했다.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따라서 당시 신문에서는 「방탄조끼」내각(內閣)이라 불렀고, 공화당(共和黨)이 국회 내에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방탄내각’ 이라는 당초의 목적을 잘 달성했다고 본다.
산업화자금(産業化資金)이 절실히 필요했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한일회담(韓日會談)을 서둘러 강력히 추진했고, 이를 위해 돌격내각이 필요했다. 영국(英國)에서 공부하고 있던 정일권(丁一權) 씨를 외무부장관(外務部長官)에 발탁할 때부터 차기(次期) 총리로 내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일회담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무명의 당돌한 젊은 엘리트 이동원(李東元) 씨가 필요했다. 박(朴) 대통령이 최고희의(最高會議) 의장(議長) 때 비서실장으로 데려다가 훈련을 시켜놓고 드디어 전선(前線) 돌파 야전사령관으로 투입한 것이다.
이렇게 박(朴) 대통령의 초창기 인사(人事)는 절묘했고 몇 수 앞을 내다보면서 상황에 잘 맞춰 나갔다. 아주 겸손했던 시절이라고 본다.
한일회담(韓日會談)이 진전되자 야당은 「대일(對日)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해 본격적으로 반대투쟁에 나섰다. 제3공화국의 첫 번째 위기였다. 1964년 5월말 경, ‘김(金)·오히라(大平)’ 메모가 누설되었다.
‘무상공여 3억 달러 10년 분할 제공, 유상공여 2억 달러 10년 분할 제공, 상업차관 1억 달러 plus 알파’라는 메모의 내용은 민족감정(民族感情)에 불을 붙였다.
야당은 물론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들고 일어났다. 각 학교별로 경쟁이나 하듯이 데모가 연일 계속되고 수그러들지 아니하였다. 중앙청(中央廳) 앞은 매일 수많은 학생으로 포위되고 한때 경찰, 수위들의 저지선이 뚫리면서 일부 학생들이 중앙청에 난입했다. 맨 앞줄에 섰던 어린 ‘양아치’들이 우리 사무실까지 침입해 전화기를 채서 도망가는 등 한동안 완전 무법천지가 되었다.
이런 혼란이 오자 최두선(崔斗善) 총리는 제 3공화국 출범(出帆)시(時)에 내약(內約)이 있었던지 본대(本隊)가 앞에 나오는 원안인사(原案人事)를 청와대에 건의했다고 한다. 즉 정일권(丁一權) 내각이 발족하는 수순을 밟은 것이다. 이렇게 ‘방탄내각’은 5개월 만에 그 수(壽)를 다한 것이다. 편하게 모시던 어른이 떠나시자 몹시 섭섭했다. 그러나 최(崔) 총리님은 대단히 홀가분한 표정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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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청 앞에서 / 왼쪽이 필자, 다음이 박정수 수석, 그리고 맨 우측이 김형무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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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권(丁一權) 외무부장관이 총리로 부임하자 수석비서관(首席秘書官)들은 교체되었으나 정무실(政務室)은 별 변동이 없었다. 그리고 군(軍)에서 안면이 있었던 분들이 정(丁) 총리를 수행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합류가 되었다. 또한 정(丁) 총리의 총리실 인사원칙은 ‘사고만 치지 않으면 내보내지 않는’ 너그러운 것이었다.
특히 청와대와의 역학관계로 보아서 당신의 세력을 키우거나 부식하는 데에는 몹시 조심하는 것 같았다. 세력이 커지면 반드시 모반(謀反)한다는 것이 박(朴) 대통령의 지론(持論)이 아니었든가 생각한다. 5.16 직후의 알라스카 토벌을 비롯하여 JP에 대한 지속적인 견제, 윤필용의 거세 등에서 잘 읽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丁) 내각이 출범하자 며칠 되지 않아 헌정(憲政)의 위기인 6.3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바로 전날 학생 1만여 명이 박(朴)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며 파출소를 점거하고, 중앙청에 난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김준연(金俊淵), 서민호(徐珉濠) 등 야당 중진들은 박(朴) 대통령이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근거도 없는 발언을 국회에서 서슴없이 해대는 일이 벌어졌다.
공화당 당료(黨僚)와 민기식(閔璣植) 육군참모총장을 필두로 한 군(軍) 강경파들은 대책을 강력히 요구했고 드디어 청와대에서는 6월 3일 서울 일원(一圓)에 계엄령을 발동하기에 이른다. 헌정(憲政)이 일시 중단되는 첫 케이스였다.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國務總理)
정(丁) 총리가 부임하면서 나는 3乙에서 3甲으로 진급을 했다. 그전에 무임소장관실에서 3甲으로 있었던 나를 일반직 공무원 경력 기준으로 따져 3乙로 책정했던 일이, 임(林) 실장에게 항상 부담이 되었던 모양이다.
정(丁) 총리를 수행해서 새로 들어온 비서진 중에서 경력상 나와의 형평성 문제가 불거지자 임(林) 실장이 주장해서 나의 진급도 같이 해결했다는 후문이었다. 3乙로 임관된 지 6개월 만의 일로 고속성장이었다.
심각했던 6.3사태는 김종필(金鍾泌) 당의장(黨議長)의 제2차 외유(外遊)와 김준연(金俊淵), 서민호(徐珉濠) 의원의 구속으로 수습이 되기 시작했다.
한일회담(韓日會談)은 그 후 1965년 6월 22일 양국의 외상(外相)이 참석한 가운데 일본 동경(東京)에서 서명되었으며, 8월 14일 여야(與野)간에 심한 몸싸움 끝에 국회에서 비준 통과되었다. 당시 일본 외상(外相) 「시이나(椎名)」씨는 윤보선(尹普善) 대통령과 너무 닮아 신문에 게재된 사진을 보고 윤(尹) 대통령이 협정서명(協定署名)을 참관했다는 헛소문이 나돌아 실소를 불금했다.
정국이 다소 안정되고 총리실도 큰 기복 없이 제자리를 잡아갔다. 특히 임(林) 실장이 우리나라 Africa 외교의 거점인 「케니아」대사(大使)로 나갔고 그 후임에 서울상대(商大) 1회 졸업에 해병대 대령으로 예편한 홍성철(洪性徹 : 前 내무장관 역임) 씨가 부임했다.
그리고 정무(政務) 업무와 시정(市政) 감독업무를 강화하기 위해 정무비서관(政務秘書官) 자리를 1급(級)으로 격상시키고 재무부(財務部) 기획관리실장을 역임한 박승복(朴承復) 씨를 수석(首席) 비서관으로 임명했다.
시정(市政) 업무를 제외한 정무업무는 가급적 예민한 주요정책사항은 피하고 공무원의 기강문제, 민원편의를 위한 일반사항을 총리훈령(總理訓令) 또는 지시(指示)로 작성하여 해당 부처(部處)에 내보내는 일들이다.
‘연말연시의 공직자의 자세’, ‘해외 입출국시 대거 환영, 영접의 금지’, ‘정기(定期) 지방(地方)버스의 시간 지키기’ 등 그리고 종종 총리(總理)의 국회 답변서도 포함된다. 우리 비서진들은 청와대와의 역학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쪽과 conflict(마찰) 되는 일은 가급적 피해 갔다. ‘월동서민생활대책’, ‘소양강댐 건설 문제’, ‘서울대학교 이전 및 부지(敷地) 선정’ 등 꽤 비중이 있는 문제들을 다루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