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섬을 일주한다는 일정이 발표되었다. Hawaii보다는 싼 1$을 도시락 값으로 받는다. 신청을 해놓고 있으니 Agana시(Guam의 수도)에 사는 교포 부부가 우리를 초청한다는 연락이 왔다. 10여 일의 항해 후 육지에 내리니 땅이 흔들흔들하는 것 같다. 대지(大地)의 냄새도 물씬 난다.
40여 일을 항해하며 악전고투 끝에 West Indies 군도에 도착한 Columbus가 상륙하자마자 땅에다 키스하며 “오, 하나님!” 했던 상황을 연상케 한다.
고맙게도 Hawaii에 오래 거주하다 Guam에 미군기지가 강화되면서 이주해 왔다는 70대(代)의 노부부가 우리를 초청해서 Garden party를 준비했다고 한다. 부동산, 그리고 수퍼마켓 등으로 재산을 모았고 이제는 고국을 위해 돈을 쓰겠다고 작정했단다. 우리 해·공군 장병이 귀착(歸着)하면 반드시 초청해 위로연을 베푸는 것이 그들의 업이라고 했다.
약 1개월 전, 100마일의 강풍으로 나무 집은 모두 폭삭 쓰러지고, 콘크리트 집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Agana 시(市)를 가로질러 동쪽 해변에 위치한 김(金) 선생님의 집은 「콘크리트」의 완벽한 구조여서 무사했다. 잔디도 푸르고 단층집인데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었다. Barbecu로 대접을 받았는데 아주 푸짐했다.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양배추에 약간의 고춧가루를 뿌려 만든 간이 김치는 굶주린 우리들을 만족시키는데 충분했다.
이 부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계열로서 이승만 박사와는 반대편에 있었고 정치적 색깔이 분명해서 아주 재미가 있었다. 우리들이 모르는 이 박사에 관한 많은 일화를 들려주었다.
Agana시에서 목격한 특이한 것은 새로 심은 가로수인 야자나무에 서식하는 달팽이였다. 이 달팽이는 일본군이 장기속전을 준비하면서 식량 대용으로 이주시킨 것인데, 남양(南洋)의 풍토에 잘 맞았는지 왕성하게 번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개체수가 늘어나 Agana 시청에서 골치를 앓고 있다고 했다.
바람 불어 길바닥에 떨어진 달팽이는 차가 지나가며 깔아뭉개고 사람이 인도에서 밟아 부수고 해서 도로가 온통 달팽이 쓰레기로 엉망이었다. 특히 번식기인 6~9월까지는 냄새 때문에도 곤욕을 치른다고 했다. 식용달팽이를 좋아하는 프랑스에 수출하면 좋지 않겠냐고 해서 모두 웃었다.
그리고 밀림지대에는 독사가 많이 번식하고 있어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Guam에는 원래 뱀 같은 파충류는 서식하지 않았으나 일본군 쪽에서 들여와 방사했다고 한다. 생태계 교란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생각했다. Hawaii에 들어갈 때 검역상 가장 까다로운 것이 동식물의 반입이다. 거의 마약 이상으로 신경을 쓰는 것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다음 날 새벽, 군용 버스에 타고 섬 일주 관광에 참가했다. 일본군에서 쓰다 버린 야포, 장난감 같은 전차 등을 길가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섬 끝에 도달하니 점심때가 되었다.
간이 휴게소가 마련되어 있고 전쟁 박물관도 구비해 놓고 있었다. 일본군의 빈약한 보병군장 이런 걸 가지고 어떻게 그 막강한 미군의 화력을 감당했을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상씨름과 애기씨름인데 3~4년을 버텼으니 대견하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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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같이 승선했던 김정근 박사(뇌신경외과 1세대 하버드에서 수학). 가운데 최종성 박사(후에 총신대 총장 역임), Guam도에서 적도 태평양을 지나면서 많이 그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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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안에 또 하나의 관심이 가는 전시물은 일본군들이 항복 당시에 사용했다고 하는 백기(白旗)였다. 옥쇄(玉碎)를 했기 때문에 모두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백기를 들고 항복해 온 일본군이 있었던 것이다(Guam에는 일본 민간인 이주자가 없었음).
또, 출정할 때 가족이 만들어 주는 호신용 「천인(千人) 뜨개질」(일본인들은 ‘센닌바리’라고 해서 남편이나 아들이 전장에 갈 때 무운을 빌고,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흰 광목천에 1,000명의 여인에게서 한 땀 한 땀 매듭을 받는 정성어린 행위가 있다. 이 광목을 복대로 해서 지니고 있으면 죽지 않고, 용감하게 싸운다는 미신에 얽힌 호신 물품이다)이 많이 걸려있었다.
꿰매어진 군화, 군복, 개인장비 등 악전고투도 미군의 물량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던 모양이다. 탄약도 다 소모하고 죽을 총알도 없으니 백(百) 길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할 방법밖에 없었으리라. 그 현장도 안내를 받았다. 무모한 인간들!
주변은 아직 미답의 정글이다. 앞으로 많은 정리가 필요하며 일본 정부와 협력해서 밀림 속 토치카 등의 발굴 작업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교대 병력이 타고 내린 후에 배는 다시 출항했다. Manila, Subic Bay까지 장장 1,500mile을 항해하는 동안, 미군의 항공모함 전단(戰團) 두 집단을 맞았다. 밤에 맞이한 항공모함 전단은 비(非)작전 중인 모양으로 모든 함정에 밝은 불을 켜서 불야성을 이루고 서 있었다. 어느 한 큰 도시를 연상케하는 대(大) 함대이었다. 여기에서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는 모양이었다. 구축함과 「랑데뷰」하며 로프 위로 뭔가 왔다 갔다 한다.
그 다음에는 하루쯤 더 달린 후 오후 3시쯤인데 앞에서 우리 쪽을 향해 또 한 무리의 전단(戰團)이 질서정연하게 가운데 항공모함, 양쪽으로 구축함, 등 여러 척의 배들이 엄호하는 가운데 유유히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역시 태평양은 미국의 바다라는 것을 실감했다.
4일째 되던 날 오전, Subic Bay에 입항하고 곧이어 출항했다. 마지막 1,700여 mile을 가면 인천항에 도달한다. 예정으로 약 4박 5일 후라고 했다. 마닐라를 출발한 배는 분명히 북쪽으로 뱃머리를 틀고 있는 것이 역력했다. 해가 모처럼 등 뒤에서 비추인다. 대만 동쪽 해안을 따라 하루 쯤 항해하더니 드디어 일본 오키나와를 우측으로 끼고 전진한다. 일본어 방송이 나오고 일본 가요가 요란하게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이제는 동양(東洋)에서도 극동(극동) 쪽으로 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루 또 한밤을 자고 갑판에 올라가니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한국 방송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반가운지 눈물이 난다. 혼자 자리를 비켜 눈물을 닦는다. 나만큼 많이 주변의 혜택을 받은 자가 눈물을 흘리다니 그저 말 못할 그리움과 감사의 눈물이겠지 했다.
30,000톤의 Sultan호는 인천항에 직접 입항(入港)을 못한다. 소월미도 바깥쪽에 오전 10시경 도착했다. 모두 하선(下船)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나는 제일 뒤에 내리기로 하고 갑판 위에서 낯익은 인천항을 보고 또 보고 했다.
그런데 낯 뜨거운 일이 시작되었다. 수십 척의 조그만 전마선(傳馬船)에 꼬마들이 노를 저으며 다가와 배에 타고 있는 미군(美軍)에게 구걸을 하는 것이 아닌가. 재미가 나는지 철없는 병사들은 담배 몇 개비를 던져주고 초콜릿, 껌, 쿠키, 콜라 깡통 등을 던져주면 아이들이 용케 두 손으로 잘 받아들면 박수를 치는 꼴불견 장면이 전개되는 것이 아닌가.
창피하고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다. 그동안 미(美) 장병들을 상대로 한국의 유구한 문화유산과 효도, 염치 사상을 설파했던 나로서는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었다. 아뿔싸! 이것이 앞으로 내가 살아갈 조국의 현실인가 싶어 서글펐다.
「필리핀」출신 갑판종업원(2차 대전 때부터 미 해군 군속으로 일했다고 하는 노인(老人) 선원들: 나와는 항해 도중 많은 대화를 했음)들의 도움으로 이삿짐을 LST에 내리고 드디어 인천항 부두에 올랐다. 간단한 입국 절차와 세관을 통과해 나오니 반갑게도 나의 친구 하재윤(河在潤) 군이 나와서 영접해 주었다.
25일에 걸친 장장 8,000mile(13,000km)의 항해 끝에 나의 조국 한국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유익한 여행이었다. 주선해 준 한미재단(韓美財團)과 미군(美軍) 당국에 감사를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