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행 버스는 밤 8시 30분에 출발 한단다. 다소 시간이 있어 상점에 들러 중년부인인 점원과 대화를 하게 됐다. 「버스 여행과 식사 문제」를 알아보려고 말문을 열었다. “저는 미국에 유학 온 한국학생인데요, 뉴욕까지 갑니다. 여행 중 식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했더니, “한국에서 왔다고?” 하고 되묻는다. “네, 그렇습니다.”를 표현한다는 것이, “That's right!” 했더니, 대뜸 “이제 갓 도착한 학생치고는 말이 좀 불손하네, G-I English 잖아, 대신 That's right, yes. 하면 대접받지.” 라고 하지 않는가.
That's right는 우리말로 치면 「그렇지」 또는 「맞아」에 가까운 표현인 것이다. 무의식중에 중년부인에게 친구 대하듯 한 것이 지적을 받은 것이다. 이제 부인들과 대화할 때는 조심해야겠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약 8시 20분경 “New York, New York!” 하고 부른다. 얼른 쫓아가 줄을 서는데, 약 20여명의 승객이 도열했다. 거대한 2층 버스인데 짐은 아래쪽에 차곡차곡 싣는다. 운전수는 아래쪽에 있고,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2층 쪽의 좌석이다. 뒤로 재끼면 침대가 되고 비행기 좌석보다 훨씬 편하다.
그 당시 서북부 지방은 아직 고속도로가 완성이 안 된지라 재래 국도를 달려가는데도 약 100km의 속력을 내고 간다. 잠이 오지 않아 운전수 좌석 쪽으로 내려가니 조수석에 앉으라 한다. 앞쪽의 전망의 훨씬 아름답다. 차는 「캐나다」와 미국 국경 가까이를 달리는데, Washington 주와 Idaho 주는 로키산맥에 인접해 있어 무성한 산림의 연속이었다. 푸른 전나무가 흰 눈에 뒤덮여 장관이다.
별 셋을 단 노신사 운전수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야밤 운전도 재미있게 해 나간다. 25년의 경력인데 내년에 은퇴할 생각이고, 따뜻한 「마이애미」에서 여생을 보낼 계획이라고 일러 주었다. 나에겐 꿈같은 이야기다.
아침 식사 시간 즈음해서 Montana 주 서쪽 Missoula 시(市)에 도착했다. 벌써 2개 주(州)를 주파하고 제 3의 주에 당도한 것이다. 약 한 시간 정차하니 식사도 하고, 샤워도 시간이 있으면 할 수 있다고 했다. 화장실에 먼저 쫓아가니 깨끗한데다 세면기에 찬물, 더운물이 콸콸 쏟아지고 샤워를 하는지 김이 무럭무럭 난다.
시간제 수도에 익숙한 나에게는 별천지였고 얼마나 풍요하면 그런 시골 터미널에 샤워장까지 마련해 놓고 있는지 조금 이질감까지 느껴진다. 식사도 뷔페인데, Hot cake 더블덱에 에그 프라이까지 얹고 소세지, 베이컨까지 배불리 먹고도 50센트이고 커피는 거저다.
식사가 끝나니 바로 출발이다. 내 옆에 새 승객 한 분이 탔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자그마한 체구의 중년부인인데 약간 촌스러우면서도 기품이 있었다. 이야기가 시작이 됐다. 중년부인은 Dakota까지 간다고 했다.
나는 유학 온 한국 학생인데 펜실베니아의 Lafayette에 간다고 했다. 그 대학을 아느냐고 했더니 잘 모른다고 했다.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Havard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들어서 안다고 했다. 그리고 Chicago 동쪽으로는 가본 일이 없기 때문에 동부는 잘 모른다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미국 대륙이 얼마나 넓고, 고등교육기관도 4,000여 개나 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완전히 촌뜨기였다.
Montana의 Butte, Billings를 지나 North Dakota의 Fargo 시(市)에서 저녁을 먹었다. 밤새 달려서 Minnesota주의 Minneapolis(St. Paul)을 통과하고 두 밤을 차에서 자고 나니 드디어 미국의 중앙에 해당하는 Wisconsin주에 도달했다. Dakota주 까지는 산과 구릉, 그리고 낙농이 많은 지역이라 경치가 기가 막히다. Minnesota와 Wisconsin 주(州)는 광활한 평야의 연속이고 가도 가도 펀펀한 들판이 이어졌다. 여기에서부터 반듯한 4차선 고속도로가 쭉쭉 뻗어 있었다.
드디어 3일 오전 중 Illinois 주의 Chicago에 이르렀다. 교외에서 지하로 차가 들어가더니 마치 지하철처럼 30분을 달려 터미널에 도착한다. 아마도 지상교통이 혼잡하니까 지하도로가 발달되어 있는 모양이다. 어마어마한 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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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륙횡단 때 탔던 그레이 하운드 버스 (시애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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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 가는 차는 대충 12시간 마다 바뀌는 것 같다. 소지품을 가지고 내리라는 안내가 있으면 차가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탁송한 큰 짐은 항상 새 차에 옮겨져 있어 걱정할 필요가 없다.
Chicago를 출발해 Indiana 주를 거쳐 오후 3~4시경 Ohio주 Cleveland에 도착했는데, 약 세 시간 정차한다고 했다. 충분한 시간이 있어 시내 구경을 나갔다. 특별히 시내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제부터 양쪽 볼이 가렵고 붉게 성이 나있어 약을 사러 나간 것이다. 북미 5대호(五大湖)의 하나인 Erie호에 접한 도시로 매우 아름답게 정돈된 도시였고,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인 만큼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조금 걸어서 Macy 백화점에 있는 약국 겸 화장품 가게에 들렀다. 예쁘게 생긴 젊은 아주머니 점원에게 아마도 오는 도중 「알래스카」에서 가벼운 동상에 걸린 것 같다고 했더니, Okay, Okay 하더니 크림통 하나를 열고는 나의 얼굴에 싹싹 문질러 주는 것이 아닌가. 몹시 당황스러웠으나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화장지로 곱게 닦아주기까지 한다.
안 사도 좋다고 했다. 그런 대접을 받고 어찌 안 살 수가 있는가. 새것으로 조금 큰 것을 내놓으면서 1$이라고 한다. 「낙시마」라고 미국 청년들이 상용하는 얼굴 크림인데, 소독 성분이 있어 거친 피부에도 좋다고 한다. 미국에 있는 동안 Skin과 이「낙시마」만 사용했다.
여기저기 두루 구경에 정신이 팔려 버스 출발 시간 약 30분 전에 터미널에 도착했다. 웬일인가! 뉴욕 행 나의 차편은 장사진이다. 주말인 것이다. 아찔했다. 대충 세어보니 도저히 내가 탈 가능성이 없을 것 같다. 그러다가 「선취특권」이 나에게 있으니 태워주겠지 하고 줄 뒤에 섰다.
드디어 개찰이 시작되더니 내가 선 5, 6명 앞에서 승차가 완료된다. 짐은 그 차에 실려 있는데 차를 놓치면 난감한 일이다. 앞으로 쫓아 나갔으나 차는 이미 문이 닫히고 스르르 떠나려고 한다. 개찰했던 흑인 아저씨가 쇠줄로 문 쪽을 막더니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한다. 다급해서 “Hey! Where is my bus? I came from Seattle, you know!” 했더니 양 손을 저으면서 “Don't worry, Don't worry.” 하면서 그 자리를 떠난다.
무슨 뜻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고, 버스는 속절없이 떠나고 말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서있던 줄이 흐트러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 앞사람에게 물었더니 차가 또 하나 온다고 한다. 다음 차는 상당히 뒤에 오겠지 했는데, 금방 아까 그 흑인이 나타나더니 “New York, Pittsburgh, New York, Pittsburgh!” 하고 고함을 지른다. 그 순간 작은 1층 차 약 40인승 버스가 한대 도착하며 개찰이 시작된다. 이 차를 타면 Pittsburgh에 가서 앞차를 만난다는 것이다. 추가로 못 탄 승객을 위해서 배차가 신속히 된 것이다.
벌써 매표소에 만원이 되면 예비차가 즉각 수배되는 시스템이 되어 있는 모양이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못 타면 나의 불찰이고, 자고 다음날 가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시골에서 버스를 타려면 정확한 시간보다는 오전에 또는 오후에 오는 차로 알고 마냥 기다려 본 경험도 있다. 눈길 고속도로를 줄기차게 4~5시간 달리더니 Pittsburgh에 곧 도착한다고 했다. 약 10여 명 남짓한 승객을 위해 차 한대를 동원한 것이다.
터미널에 도착해 보니 앞서 간 차가 막 들어오고 있다. 우리가 오히려 더 빨리 온 것이다. 내리면서 앞에 서 있는 관리자에게 나의 느낌을 말했더니 자기네 회사가 Over booking을 했으니 회사 책임이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미국식 캐피탈리즘」의 고객(소비자)에 대한 책임의식을 경험한 첫 번째 사례였다.
밤중에 다시 출발해 Pennsylvania의 수도 Harrisburg를 지나 드디어 나의 목적지인 New Jersey 주와 Pennsylvania 주의 경계에 위치한 Easton에 도착했다. 차 안에서의 3박 4일이었고, 10개 주를 관통해 미 대륙(美 大陸)을 무사히 횡단한 것이다.
Easton시에 도착하여 차창 밖을 내다보니 Stevens 박사와 부인 Mae Ann이 기다리고 있었다. 1953년 봄, 전쟁터에서 헤어진 지 장장 9년만의 재회였다. 이제부터 이 두 분의 신세를 져야 하고 신의 가호가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