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에서는 현상유지 정도로 했고 한국에서 원전 2기 입찰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식이 뛰어 10$ 하던 것이 13~15$ 정도로 치솟는 바람에 경영진에서 덕을 봤다는 후문이다. 그 후 몇 년 뒤 Sweden의 A.B.B.가 C-E를 인수하는데 한국 프로젝트는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1987년 5월 사업 착수 승인서가 발부되면서 그동안 고리 현장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던 원자력연구소의 정예요원 50여명을 C-E에 일차로 파견했다. 미국 코네티컷주(州) 중부, 고급 담뱃잎과 옥수수재배로 유명한 Widsor 그리고 짙은 숲속에 자리 잡은 C-E 본부는 유럽 어느 고도(古都)의 수도원 같은 곳이다. 여기에서 앞으로 2,3년 NSSS 설계를 위해 불철주야 일할 KAERI 요원들은 여장을 풀게 된다. 계속 증원되어 100명으로 늘고 2년 후 울진 3,4호기까지 합류하자 피크타임 160여명까지의 인원이 Widsor에서 활동하게 된다.
핵(核)설계 7명, 유체(流體)설계 12명, 기계설계 9명, 제어계통 9명, 안전해석 7명, 설계관리 6명 계 50명의 1차 요원들은 훈련과 참여를 동시에 해 내면서 많은 고생을 했다. 격려차 C-E를 방문한 한필순 소장은 C-E와 연구소의 우의의 표시로 신라왕관 복제품을 선물했는데, C-E 본부 중앙현관에 전시되고 있었다. 현지에 이웃마을 사람들까지 구경하러 들른다는 이야기였다.
합동 설계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설계센터를 Widsor에서 대덕연구소로 옮기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역시 원전 현장이 한국이고 해외에서의 작업은 그 품질이나 생산성에 있어 많은 제약을 받기 때문에 하루속히 한국에 「센터」를 이전한다는 방침으로 한국전력, 원자력연구소 경영진에서 꾸준히 추진되어 왔다.
연구소 인력이 가능한 한 많이 참여하고, C-E사 인력을 최대한 유입시키는 동시에 조직 내 간부계층과의 합동작업을 통해 종합하는 능력을 최대한 길러가는 전략이었다. 다시 말해 PM, APM, PT 등을 양성하는 기회를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었다. 1989년 초부터 연구소 설계진 60여명이 C-E에서 철수하고 대덕으로 귀환했으며, C-E 본사에서 7~10여명의 미국인 기술자가 대덕에 상주하며 연구소 팀과 작업을 합동으로 계속해 나갔다.
서울에 위치한 C-E지사는 이들 C-E 요원들의 후생복리 문제를 지원했고, KAERI와 업무협조를 수행해 나갔다. 1994년 초부터 96년 상업운전까지의 막바지 시간은 그야말로 전쟁이나 다름이 없었다. 처음 하는 일은 항상 어렵기 마련이다. 10여개에 가까운 관련사 간의 관행 차이, 국산화 부분의 최대화를 위한 노력과 국내 공급자의 기술 및 경험미숙 등으로 그야말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각 공급자들의 책임감 그리고 해내겠다는 의지와 끈기는 결국 일을 성공시키고 말았다.
공사기간 단축뿐만 아니라 외국회사들에 안전보증도 줄기차게 요구하여 관철해 나갔다. 다시 말해 영광 3, 4호기의 성공적인 상업운전으로 우리나라 원전 건설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고, 개량된 한국형 원자력발전소의 기초모델이 되었다.
이렇게 성공리에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참가한 젊은 Engineer들의 애국심과 일에 대한 책임감이 끝없이 왕성했고, 이들을 이끌어 가는 간부들의 혼신의 노력, Leadership이 적절히 존재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15년이 경과한 지금, 과연 당시의 의욕과 기백이 오늘날 그리고 앞으로 재현될 수 있을 것인지 자문자답을 해 본다.
한필순(韓弼淳) 박사의 지휘 하에 원자로 계통설계 본부장을 맡아 초창기 그 기초를 다진 응용물리학의 거장 정문규(鄭汶奎) 박사(정 박사는 우리나라에 중성자가속기를 처음 도입, 운영했던 석학이었다), 정 박사 후임으로 학벌과 경력이 남다른 유치과학자 김병구(金炳九) 박사 그리고 「카네기 메론 대학」에서 박사학위 할 때 우수논문으로 유명했으며 IAEA의 Bureau Director General로 근무하며 국위선양을 다했던 전풍일(全豊一) 박사, 대우건설 등 해외 현장 경험이 특출했던 이병령 박사(연구소에 스카웃 되어 입소해 보니 박사 아니면 맥을 못 추는 곳이라 걷어붙이고 직장 일을 하면서 KAIST에서 기어이 박사학위를 끝낸 입지전적인 인물) 등이 NSSS 설계단장으로서의 중책을 담당했다.
그리고 끝으로 Florida 대학에서 학위를 마치자 바로 연구소에 유치과학자로 도착, NSSS 설계 초창기부터 사업에 참여했던 한기인(韓基仁) 박사, 영광 3, 4호기와 울진 3, 4호기의 상업발전까지의 전 과정을 「마스터」한 한 박사는 1차 국산화의 대장정을 마무리 짓고, 1997년 1월 350여명의 거대한 기술진을 이끌고 한전기술(주), KOPEC에 합류했다.
나는 C-E의 자문역으로서 종종 이병령 박사와 한 박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두 사람은 성격에 있어 매우 대조적인 점을 발견하고, 일본 전국시대의 인물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연상해 본 적이 있다. 오다는 「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흔들어라」, 도쿠가와는 「새는 어느 땐가는 울게 되어 있다.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자 하면 좀 참고 기다려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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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기처 전학제 장관의 <아리조나> C-E 발전소 시찰 (1986.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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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오다는 그 용맹과 지략으로 일본 열도를 통일한 첫 번째 장군이 되었고, 도쿠가와는 좀 시간이 걸렸지만 300년의 막부시대의 기초를 닦아 갔다. 여담이지만 어느 날 C-E의 지사장 Peter Mihan을 만났더니 이 박사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다. 나의 대답 왈, “젊은 혈기와 원전 국산화에 대한 과한 욕심의 발로(發露)가 아니겠느냐. 애국하는 기술자인 것 같다.”고 했더니 “애국하는 건 좋은데, He is anti-American.” 라고 해서 나는 좀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 박사는 C-E와 싸워가면서 그 많은 기술 자료를 입수하고 부동의 자세로 계약상 갑(甲)의 위치를 고수해 나갔고, 연구소를 사직한 후에 급기야 정계로 진출하는 길을 택했다.
1991년 8월 나는 C-E 자문역을 사임했다. 나의 Counter-partner였던 Mihan 지사장이 본국으로 귀환하게 되고, C-E의 한국 내 사업이 모두 정상궤도에 오르면서 나의 역할이 점차 줄어들었다. 때가 자연스럽게 온 것이다.
C-E Consultant 8년을 포함해 직, 간접적으로 원자력 분야에 참여한지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원자력 선진국의 대열에 당당히 참여하게 된 지금 회고하건대, 고비마다 그 발전과정을 증인으로 지켜보았고, 직접 기여한 부분도 있어 매우 보람을 느낀다.
중국과의 수교 후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한국을 국빈방문 했을 때 가장 관심 있는 분야로서 원전과 포항제철을 꼽았다. 당시 한전 사장이었던 이종훈(李宗勳) 씨가 중국의 요청으로 강(江) 주석의 숙소를 찾아가 「한국 원전의 현황」을 직접 브리핑함으로써 중국정부의 핵심계층과 친교의 물꼬를 튼 일 등은 우리 외교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라 하겠다.
그 후 양국의 협력을 통해 부분적으로 우리가 중국 원전 건설에 기술참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10여 년간 세계 최고 원전 운전율을 기록함으로써 우리나라 기술을 세계 만방이 인정하게 되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2010년 UAE의 프로젝트를 선진제국을 보기 좋게 물리치고 성공시킨 쾌거를 이룩함으로써 우리 원자력 역사에 신기원을 마련하게 되었다.
Epilogue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영욕(榮辱)이 따르는 법이다. 신군부가 물러가고 YS정부가 들어선 후 얼마 있지 않아 신동아(新東亞) 이종창(李鍾昌) 기자가 광화문 나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신동아 잡지 구매 문제로 왔는가 싶어 나는 20여 년간 정기구독을 하고 있다고 했더니 그것이 아니라 원전 도입과 관련된 문제로 취재하러 왔다고 했다. 내용인즉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정권 때의 정치자금을 캐는 문제인 것 같았다. 나와 C-E와의 관계 그리고 C-E와 연결된 동기 등 성실하고 정확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는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다음 달 신동아에 「원전 도입의 흑막」이라는 큰 타이틀로 기사가 나왔다. 읽어보니 나의 기사에 관한 황당하기 짝이 없는 내용인데, 이것은 완전히 소설을 쓴 것이었다. 예를 들어, 당시 한전의 원전 관계 사업본부장이었던 이호림(李虎林) 씨의 부인과 나의 내자를 꽃꽂이계의 쌍벽으로 데뷔시키고 가정적으로 각별한 친소(親疎)가 있는 것처럼 언급하면서 「로비」를 성공시켰다느니, 내가 군대 장교 출신으로 신군부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부각시키며 원전 도입에 「마피아」의 일원으로 단정하고 있어 대단히 섭섭했다.
그 후부터 주간(週刊)이나 월간(月刊)에 폭로기사가 나면 믿지 않거나, 많이 할인해서 보는 이상한 습성이 생겼다. 좀 과장해서 쓰는 것은 이해를 하지만, Fact와 거리가 먼 경우에 당하는 사람은 너무 억울하고 당사자로서는 어디 호소할 데도 없을 것이다. 항의해도 사과 한 마디 없다. 지금 같아서는 인터넷, E-mail, 블로그 등으로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할 수 있는데,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이호림 씨와는 한참 후에 KOPEC 동우회 모임에서 만나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