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탈출 후 다음날 8월 14일의 아침이 왔다. 조반을 해서 먹고 어젯밤 모의했던 일을 실천하는 것이다. 잠시 의논한 결론은 젊은 청년 4명이 집단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우선 위험하고, 가급적 8.15를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진과 이진 두 팀으로 나누고 일진은 오늘 서울에 입성하고, 이진은 8.15를 지낸 다음 서울로 들어가는 것으로 했다.
가장 어려웠던 계획 중 하나가 어떠한 방법으로든 두 명 중 한 명이 신체상의 장애를 고의적으로 만들어 내는 일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 병신이 되는 길이다. 형님과 윤 선생이 먼저 서울로 떠나는 것으로 했고, 장애는 진성이 형님의 몫이 되었다. 형님이 아침밥을 지어 먹던 냄비에 물을 펄펄 끓이더니 왼쪽 팔에 붕대를 감고 그 위에다 들이 붓는다. 붕대를 풀고 화상 입은 부위에다 붉은 색 소독약을 듬뿍 바른다. 흰 붕대로 목에다 걸어 매니 영락없는 부상자가 됐다. 이제 작별의 시간이 왔다.
두 형이 떠난 다음 진식이 동생과 나는 하루나 이틀을 보내기 위해 정처 없는 걸음으로 무조건 서쪽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정오가 되자 왕릉 같은 큰 묘역이 있었다(지금 생각건대 선능 이었다). 거기서 남쪽으로 꺾어 숲이 무성한 언덕으로 올라가니 조그마한 암자 하나가 보였다. 몇몇 피난민 가족인 듯한 일행도 있었다. 불국사(佛國寺)라는 조그마한 현판이 붙어있다.
주지스님에게 부탁하여 하루 묵기로 허락을 받았다. 우리 나이 또래의 예쁜 여학생이 있는 가족은 차림이나 외모로 보아 인텔리 집안으로 보였다. 여학생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서울에서 피난 왔으며 아버지가 변호사라는 것을 알았다. 하룻밤을 보내고 새 아침이 밝았다. 하루 더 묵는다는 것이 왠지 부담스럽고 어머님의 해산 문제도 걱정이 되었다. 오늘 8월 15일 결행의 날이라고 다짐했다.
아침을 해 먹고 진식이 동생에게 나의 뜻을 전하고 약과 붕대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처음에는 고통과 상처 등을 생각해서 냄비에 물을 반쯤 넣고 팔팔 끓였다. 그리고 붕대도 여유가 없고 해서 맨팔에 끓인 물을 부어 볼 생각이었다. 냄비를 오른손으로 들어 올리는데 아뿔싸, 너무 뜨거워서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다시 끓일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니까 이제 해야만 한다는 담대한 생각 밖에 남는 것이 없다. 냄비의 반이 아니라 냄비 가득히 물을 붓고 부글부글 끓인다. 왼팔은 바위에 걸쳐 대고 눈을 질끈 감자마자 사정없이 들이부었다. 앗! 온 몸의 신경이 팔에 집중되면서 갑자기 나의 신체가 팔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느낌, 나의 몸의 실존(實存)이 완전히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다. 아픔은 그 후에도 여진처럼 계속 괴롭히기 시작했다.
여학생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진식이 동생이 대들어 치료를 해야 하는데 경황이 없으니 멍하니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엉겁결에 오른손으로 뺨을 후려치면서 “이 놈아, 정신 차려!” 하고 고함을 질렀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동생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달려온 여학생도 돕느라 정신없다. 우선 붉은색 소독약 「머키로륨」을 부어 바르고 따갑고 아프니까 붕대로 칭칭 감는 처치 방법 밖에 없었다. 곧이어 붕대 밖으로 물집이 튀어나오고 온 팔이 부어오르기 시작한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팔을 목에다 비끌어 매고 처치가 끝나자 ‘아! 이제는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시내 한복판을 걸어가건 인민위원회 앞을 지나가건 이 상이용사를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하는 극한의 해방감을 느꼈다. 식사도구 등 무거운 짐은 진식이 동생이 지고, 나는 담요 같은 가벼운 짐을 릭삭(배낭)에 넣어 짊어지고 봉은사 쪽으로 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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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공치하의 서울 [사진출처 : 전쟁기념관 홈페이지에서 캡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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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넘으니 한강이 나타나고 바로 뚝섬 건너편이었다. 다행히 나룻배가 있어 쉽게 건너갈 수 있었다. 인공(人共) 치하에서는 사람이 이동 제한을 많이 받았다. 요소요소에 검문하는 사람이 배치되어 반드시 어디 사는지, 어디를 가는지를 물어보는 것이다. 봉은사 나루터 양쪽에도 완장 찬 사람이 서 있었다. 그러나 부상이 심한 듯한 나의 몰골을 보고는 무사통과다. 뚝섬 유원지에서 왕십리로 걸어 걸어 해질 무렵, 필동 집에 당도했다.
내가 부상을 당해 돌아왔으니 집에선 난리가 났다. 그런데 어머님의 진통이 바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절묘하게 타이밍이 맞았고, 무엇보다 아버님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아버님이 떠나실 때 나에게 어머님의 해산 문제에 대한 걱정을 하셨던 것이다. 이웃에 사는 요미 엄마(일가로, 누님뻘 되는 분이다)를 불러들이고 출산을 돕게 했다.
8월 16일 새벽 세시 경에 사내아이 동생을 순산하셨다. 김진철(秦哲), 그 어려운 6.25 와중에 태어나 이제 회갑을 맞이하게 되었다. 내 대학의 후배이고 나의 말을 가장 잘 따르는 동생이기도 하다.
이제 문드러진 팔을 치료하는 일이다. 첫날은 어머님의 해산 진통도 걱정이지만 아픈 팔을 어떻게 처치할 수도 없었다. 계속 생겨나는 물집을 터뜨리고 또 터뜨리고 이제는 피부 껍질이 완전히 벗겨지면서 그 아픔은 말할 수 없었다. 한숨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날 구 비서관이 찾아와서 “이 사람아! 이게 무슨 짓인가, 병원에 가세” 한다. 문제는 자해라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고, 또 너무 빨리 치료가 되어도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끝까지 자가 치료(自家 治療)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머키로륨」 만 발라대니 전혀 차도가 없다. 삼일 후부터는 곪아가면서 악취가 나기 시작한다.
어느 날 구 비서관이 흰 가루를 조그만 봉지에 넣어 가지고 와서는 “김 군, 이것 뭔 줄 아는가. 아편가루네. 이것 살살 뿌려 놓으면 직효야.” 투박하지만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다. 아편가루 뿌린 후 그날 밤은 푹 잠을 잘 수 있었다. 장장 삼일 만에 잠에 곯아떨어진 것이다. 약 일주일이 지나자 상처 부위가 꺼덕꺼덕 마르기 시작하더니 딱쟁이가 앉는 것이다.
아, 살았다, 하면서도 내심 너무 빨리 나아도 걱정이 된다. 어린 나이인데다 특효약의 덕으로 붕대를 감고 나들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침이면 언제나 고통스러웠다. 팔의 오금 쪽에 밤새 굳었던 피부가 팔놀림으로 갈라지면서 피가 흐르는 것이다. 매일 아침 닦아내고 약 바르고 하는 것이 일과였다. 이 상처는 60년이 지난 지금도 날씨가 안 좋으면 흉터가 가렵고 당기면서 아파서 지금까지 긴팔 셔츠만을 고집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