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직(就職)
기본생활이 보장된다면 나는 교직(敎職)에 관심이 있었다. 우선 모교에 찾아가 김상협(金相陜) 선생님께 인사를 했고 학교 교직에 들어가기를 희망했다. 마침 잘 됐다면서 윤천주(尹天柱) 교수께 가보라고 하신다. 윤 교수는 공화당(共和黨) 창당의 이론 기초를 제공하였고 막 공화당의 사무총장을 수락하고 짐을 싸고 있는 중이었다. 윤 교수님께서는 당신이 그동안 맡고 계시던 정치생태학(Political Behaviorism) 강의 2시간짜리를 내가 해보면 어떻겠느냐 말씀하셨다.
나는 전공이 외교사(外交史)나 국제정치학 계열로서 정치철학(政治哲學)이나 정치학설(政治學說) 같은 분야와는 거리가 멀어 정치생태학은 상당한 준비가 있어야 강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전임은 불가능하고 시간강사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시간강사로는 생활이 될 수가 없다. 너무 욕심이 많았던 것일까?
다음날 최고회의(最高會議) 상공위원(商工委員)으로 계시는 박태준(朴泰俊) 장군을 찾아 갔다. 귀국인사를 하고 자리 말씀을 드렸더니 알아보겠으니 다음날 연락을 하란다.
오는 도중 중앙청에 박원빈(朴圓彬) 경제담당 무임소장관(無任所長官)을 찾아갔다. 비서관 자리가 하나 비어 있고 청와대 특명으로 「서민 월동대책」 수립을 위한 작업 때문에 매우 바쁘다고 하시면서 특별한 자리가 나지 않으면 합류했으면 하셨다. 그러나 영구적인 자리는 못 되고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새 정부가 출범하면 철수해야 할 것이라면서 시한부 직장으로 여기라고 하신다.
다음날 박태준 장군실에 연락했더니 한국무역진흥협회(KOTRA)에 김(金) 이사(理事)를 찾아가 보란다. KOTRA 설립을 위한 준비 작업이 한참인 시기였다. 김 이사님은 대령(大領) 예편으로 안면이 있는 분이었다. 박 장군에게 연락을 받았노라고 하면서 내년(1964년 6월)에 NEW YORK에서 개최되는 세계박람회에 한국관(韓國館)이 들어가는데 준비 팀에 참가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었다. 매력적인 오퍼였다.
얼떨결에 “가족을 데려갈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이 사람아, 대사님들도 가족을 동반하지 못하는데...” 하신다.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일 년 내지 일 년 반 정도 홀애비로 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또 이산가족인 것이다. 귀국한 사정을 말씀 드리고 정중히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돌아오면서 무임소장관실에 들러 내일부터 출근하기로 하고 간단히 이력서를 작성하여 제출했다. 다음날부터 나에게는 좀 과분한 직급인 3급 갑(甲 : 서기관) 별정직(別定職) 비서관으로 임명받고 근무를 시작했다. 장관의 일정 조정과 국무회의의 안건 요약 내방객의 안내 등과 같은 평이한 일을 담당했고 모두 가족 같아 근무하기 좋았다.
대통령 선거와 박정희 후보의 좌익전력
제 5대(代) 대통령 선거도 역시 이합집산(離合集散), 합종연횡(合從連衡), 공화(共和), 민정(民政), 자민(自民), 국민(國民), 한독(韓獨)당 등등의 당명(黨名)을 내걸고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2년 만에 재개된 정치활동은 휴화산의 폭발처럼 용암이 되어 쏟아졌다. 야당은 실지(失地) 회복을 여당은 군사혁명의 당위(當爲)를 위해 필사적인 투쟁에 돌입했다. 참말로 민심의 판가름이 어려운 선거였다. 당시에는 경제개발이 어떻고 사회개발이 어떻고 하는 정책적 이슈는 유권자들에게 별로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것이었고 오히려 Soft-ware에 가까운 사상논쟁(思想論爭)이 뜨거운 쟁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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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 후보의 사상 파문 기사 (동아일보 1963. 9.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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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朴正熙) 장군의 여순(麗順)사건과의 관련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박 장군의 전력(前歷)을 낱낱이 들먹이며 박 후보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자체를 불신해 버렸다. 6 .25를 겪은 많은 국민들에게 이런 야당의 집중공세가 먹혀들기 시작했다. 박 후보가 얼마나 속상하고 급했던지 사석(私席)에서 “아니, 그래! 내가 빨갱이란 말이요?” 라고 막말까지 했다고 한다.
사상논쟁은 5대(代) 대통령 선거의 Issue로서 등장했지만 그 뿌리는 매우 깊고 역사가 있고 그리고 집요했다. 특히 미국 측의 진원(震源)은 물론이고 국내 보수(保守) 측에서 박 장군을 중심으로 한 혁명주체들의 사상적 동향에 대하여, 많은 의문과 불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5.16 직후의 일이다. 서종철(徐鍾喆) 장군이 서울지구 계엄사령관을 그만 두고 육본(陸本) G-2로 부임한 약 일주일 후에, 미(美) 8군(軍) G-2 주최로 인천 팔미도 HID 분견대에서 일요일 야유회가 열린다고 해서 서(徐) 장군을 수행했다.
도착 후 얼마 있다 김종필(金鍾泌 : 중앙정보부 준비책임자) 씨가 경호원 2명을 대동하고 자리에 나타났다. 경호원 2명 중에 나의 통역장교 후배인 김(金) 중위가 있었다. 그때 김(金) 중위를 통해 중정(中情)이 미국 CIA와 같은 조직을 구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그때만 해도 서(徐) 장군 연행과 관련한 일로 김(金) 부장과 서(徐) 장군은 서로 반갑게 인사는 했으나 좀 어색한 표정이 상호 역력했다.
위상은 180도(度) 달라졌으나 역시 육군 중령과 육군 소장의 관계임에는 틀림이 없다. 맥주 등 술과 음식이 나왔다. 그러나 「퀘이커」 교도의 모임처럼 서로 말이 없고, 술과 음식만 소비한다. 미군 정보기관 출신들은 김(金) 부장의 관심을 사서 좀 차분한 대화를 시도해 보려고 무척 노력하는 것 같은데 좀처럼 문이 열리지 않는 것 같다.
어느 정도 음식이 끝나자 가까이에 있던 Pier(棧橋)에 정박 중인 특수 임무용 고속 Pick boat 쪽으로 미(美) 장교 한 사람이 김(金) 부장을 데리고 가더니 조종 강의를 한다. 5, 6분 후에 김(金) 부장 혼자서 고속정을 몰고 신나게 섬 주위를 돌기 시작한다. 한 번, 두 번, 열 번 그리고 스무 바퀴 쯤 혼자서 돌다가 드디어 피곤하고 겸연쩍은지 Pier에다 배를 대고 천천히 육상에 올라온다. 조금 목을 축이더니 바쁜 일 때문에 가야겠다고 하며 자리를 뜨고 만다.
일련의 행동으로 봐서 대화를 몹시 부담스러운 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느 면으로 보면 외교적인 Gentleman-ship을 완전히 잊어버린 행동으로 비쳐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