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기 면학(勉學)
수강신청은 이미 해 놓았다. 1, 2학기 합해서 최소한 30학점은 되어야 1년에 석사(碩士)를 끝낼 수 있다. 2학기는 1학기의 연장이라 보면 된다. 다만 주(主) 논문의 Title을 선생님과 정해서 Aproval을 받아야 한다. 「한국전쟁과 미국의 역할」, 또 하나는 「한국전쟁과 UN의 역할」을 제시했더니 좋은 타이틀이라면서 두개 다 해보라는 것이다. 졸업생 논문을 뒤져보니 이런 타이틀은 없었다. 없는 것은 좋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참고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타 대학 것을 색인(索引)해 찾아야 하는데 작업이 방대하고 시간이 걸리는 것이 흠이다.
여하튼 교수님과 친해지는 것은 미국에서는 특히 유학생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교수들은 대체로 대학원 학생들은 자기 보좌관처럼 부려먹기도 하고 챙겨주기도 한다. 장학금은 주임교수의 추천에 의해 학과장(당시 Dr. Jyont)이 결정하기 때문에 신경이 쓰이는 법이다.
학과장은 1년에 2회 자기 집에 전 대학원 학생과 과(科) 소속 교수를 초청 Garden Party를 해준다. 아마도 학교 예산을 쓰는 모양이었다. Dr. Jyont는 지역에서 제일 큰 교회의 장로이고 많은 저서가 있어 집도 크고 살림도 매우 넉넉하게 보였다. 그리고 과 주최로 Filed trip을 나가는데 New York의 UN본부를 방문해 안내를 받고 UN출신 기자 중에서 유명인사의 강연을 듣는다. 제목은 「미 . 소 대결의 현황」 등이 주였다. 그리고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되는 World Bank 회의 등 참관이 기억에 남는다.
하루는 Christian Student Club의 한 친구가 찾아와 「흑인 인종」을 위한 Demo가 「필라델피아」에서 토요일 오후에 있는데 가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 미국에서 학생시절 이런 것을 경험해 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 yes 했다. 그러나 유학생은 정치에 관여하거나 미국 법을 어기면 추방을 당할 수 있어 염려스러웠다. 타협하기를 같이 가되 가두행렬에는 참가하지 않고 보도행렬을 따라 관람하는 것으로 양해를 구했다.
한 시간여 드라이브 끝에 필라델피아 스타디움에 도착했다. 약 만 여명이 운집했는데 이것이 웬일인가, 흑인보다는 백인의 수가 더 많아 보였다. 백인이 많은 것을 보니 추진력이 강하겠구나 느꼈다. 또한 교회 출신의 인권운동가들이 이끌고 있었다. 축복 기도부터 시작해 「흑인 인권 현황」 「흑인 인권의 필요성」 등에 관해 진보적 목회자(牧會者)들이 연설을 했다.
분위기가 고조되고 드디어 가두행진이 시작됐다. 도시 중심에 있는 시청 광장으로 향하는데 선두에는 목회자, 흑, 백인 인권 지도자가 앞장서고 차도 한쪽 편으로 피켓 행렬이 뒤따른다. 극히 평화스럽고 구호도 없다. 양편으로 군데군데 경찰관이 호위하는 것처럼 따라간다. 만일 길에 주저 앉거나 반대 차도 쪽으로 이탈하면 경찰의 저지를 받고 정도에 따라 체포되기도 한다.
나는 보도에 올라서서 우리 Christian Club 회원들을 따라 움직였다. 약 두 시간 여의 행진으로 시청 광장을 지나 해산했다. 끝나면서 모두 자기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는 만족감에서인지 서로 부둥켜안고 수고했다고 「Pat on the back」, 등을 두드리며 위로한다. 참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Comprehension Test 그리고 졸업
내가 택한 학점은 외국학생의 경우 넉넉잡고 2년, 즉 4개 학기 미국학생들도 3개 학기에 이수하는 것이 적당한 분량이었다. 빨리 끝내야 한다는 중압감에 무리를 했다. 다행히 나의 사정을 잘 아는 교수는 아주 친절하게 지도해 주었고 학생 동료들도 나의 논문을 돌아가며 Proof reading을 해주는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아르바이트하던 도서관 사서 보조도 시간관계로 그만두고 공부에 전력투구 했다.
그러나 용돈이 딸리기 시작하면서 아침을 방에서 바나나 한개 Corn flake cereal이나 토스트 한쪽으로 때우고, 점심은 Snack(burger 또는 roll)으로 끝내고 저녁식사만 정식 Dining hall에서 해결했다. 젊음이 보배인 계절이었다. 자고 나면 거뜬하고 새로운 하루를 무리 없이 정진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
|
| ▲ Lehigh 대학원 국제정치학과 일동 (11명) |
|
4월 초가 되면서 Ph. D 진학 문제가 대두되었다. Lehigh 대학원 국제정치학과에서는 Ph. D 과정이 없다. 따라서 5월 말까지 타 대학에 원서를 접수해야 한다. 한 교수는 모교인 Columbia에 추천해 줄 수 있다고 했고 또 한 교수는 Lehigh 인근에 있는 Princeton에 원서를 내 보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다만 이들 대학은 지원자가 많기 때문에 장학금을 보장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느 날 학과장인 John Joynt 박사가 부르더니 Clark University(학과장의 모교)에 추천해 주겠다고 했다. 장학금을 얻도록 최선을 다 하겠으며, 만일 안 될 경우 Tuition waive(수업료 면제)는 될 터이니 생활비는 다니는 교회에서 지변(支辨)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장까지 해주었다. 너무 감사한 일이다. 이런 좋은 제의를 받고 감격의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매주 도착하는 아내의 편지는 장기간 미국에 체류하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게 했다. 당시 국내는 군사정권의 초기인지라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했고, 경제 사정도 어렵기 짝이 없는 시절이었다. 1963년 초봄부터 극도의 한발(旱魃)로 민심이 흉흉하고 식량을 동사무소에서 배급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젖먹이 아이들 우유와 설탕을 배급받는데 한나절 줄을 서는 일까지 벌어진 모양이다.
도대체 가장이라는 자가 외국에서 공부한답시고 뒷짐만 지고 있어야 하느냐,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고 느꼈다. 아내가 두 아이를 하나는 걸리고 하나는 들쳐 업고 부산 처가로, 밀양(密陽) 언니 집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참을 수가 없었다.
타과(他科) 과목으로 미국사(美國史)를 들었는데, Term paper를 제출 후 얼마 있다가 역사학과장이 좀 보자고 해서 갔더니,「미국사(美國史)」를 Lehigh에서 박사과정으로 전공하겠다면 Assistant(조교)나 Scholarship을 마련해 보겠다고 한다. 너무 좋은 조건이었다. 국무성에서 연구용역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나에게 호감을 가진 것은 강의 시간에 맨 앞에서 열심히 경청하고 질문도 많이 했지만 제출한 기말논문 「Robert Lee 장군과 전후처리(前後處理)」에 대한 평가가 좋았던 모양이다. 한국군 장교 출신에 한국전에 참가한 경험을 살려 불우했던 미국 남북전쟁 때의 남군 총사령관 Lee 장군을 체계 있게 분석했던 것이 좋은 인상을 준 모양이었다.
곧 나의 후견인 Stevens와 의논했다. 저간의 한국 사정을 이야기하고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요지의 말씀을 드렸더니, 일언지하에 “Family first”라고 하신다. 박사학위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우선 귀국하기로 결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