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의 긴 방학동안 대부분의 재학생들은 Summer job을 찾아 나간다. 이공계 학생은 생산기업 또는 연구소 등에 가서 일을 하는데 우리네 인문사회 분야 학생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오라고 하는 곳이 거의 없다. 따라서 공사현장에서의 허드렛일, 또는 해변가 휴양지에 있는 Hotel 또는 식당에서 그릇 닦는 Bus boy 외의 일이란 거의 없다. 유학생들은 특별한 Sponsor가 없으면 고생들을 많이 했다.
나는 다행히 Stevens교수와 Pascal선생의 주선으로 Campus 우체국에서 계속 일했고, 심리학과의 Cohen 교수가 또 아르바이트를 추가로 주어서 필요한 만큼 용돈을 벌 수 있게 됐다. 심리학과 실험실에서 「모르모트」와 흰쥐를 키우는 일인데 처음에는 징그러웠으나 차츰 익숙해지면서 「모르모트」들과는 아주 친해졌다.
사료와 물을 주고 밑에 깔판(대부분 신문지나 대팻밥)을 갈아주는 일이 주 임무인데 동물사육사이기 때문에 일당도 좋았다(도서관에서 일하면 한 시간에 90센트, 사육사 일은 1.3달러를 받음). 빨리 끝내면 한 시간 반이면 족했다. 8시에 우체국 출근 방학기간이기 때문에 한 시간이면 끝내고 Summer School에 갔다가 늦은 점심을 먹고 실험실에서 일하고 귀가하는 Routine이었다.
Cohen 교수의 시험실 연구는 동물의 사회성(社會性)의 발견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한 우리에 한 쌍을 넣을 때, 두 쌍을 넣을 때 빽빽이 채워 넣었을 때의 각각의 생태와 스트레스를 보는 것인데 매우 흥미로웠다.
이제는 용돈도 다소 여유가 있고 해서 Mae Ann에게 나의 식비를 일부나마 부담할 것을 제의했다. 타교로 전학 갈 때까지 25~30달러 정도를 부담했다.
가족을 고향에 두고온 나로서는 하루가 급했다. 가급적 많은 학점을 따 두는 게 조기졸업에 유리했다. 따라서 캠퍼스에서 일할 여건이 되어 있고 장학금도 확보되어 있으니, Summer School을 겨냥해 일찌감치 수강신청을 했다. 2학기와 맞먹는 15학점을 목표로 했다.
방학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오전 Full로 강의가 배정된다. English, Diplomatic History, Economics, U.S History, 그리고 Psychology 등이었고 매우 빡빡한 일정이었으나 인원이 적고 학생들이 대부분 직장인들이어서 대하기 편했다.
교수들도 대부분 강사들이어서 젊고 박력이 있어 좋았다.
Summer School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오후에는 시간 여유가 있었다. 실험실 일을 끝내고 내려오면 캠퍼스 느티나무 밑에 언제나 앉아 소일하는 노신사 한 분이 있었다. 항상 나를 보면 반기고 대화를 하기 원한다. 알고 보니 Bergathon 총장(總長) 부인의 아버지 되는 분인데 딸네 집에서 말년에 신세를 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깔끔하게 늙어가는 이 신사는 외출할 때는 반드시 정장을 하고 파나마 모자에 지팡이를 짚고 다니신다. 대화가 길어지면 한 시간씩 걸렸다. 역시 교수 출신인데 박식하고 자상하신 분인데 외로워서 말 상대를 항상 원한다. 거의 매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게 미안한지 내가 담배를 좋아하니까 비싼 Cigar를 하나씩 선물로 주곤 했다. 미국의 노인들은 역시 소외되어 외롭기 짝이 없다.
펜실베니아 주(州)의 여름은 서울 못지않게 무더웠다. 장마는 없으나 구름띠(system이라 함)가 서쪽으로부터 다가오면 약 일주일 동안 찌는 듯이 덥고, 이 System이 비와 함께 지나가면 선선한 가을 날씨처럼 상쾌한 날이 며칠 계속된다. 여름은 이것의 연속이다.
마을 이발소, 식당, bar 등도 문을 닫고 사람들은 대부분 해변으로 휴가를 떠난다. 그러나 학교후문에 위치한 Town Pub(cocktail과 간단한 식사 제공)인 Earny's는 연중무휴다. 가끔 커피나 맥주 생각이 나면 들러서 한잔씩 하고, 주인인 Joe와도 친해졌다. 주인 외에 시간제로 남녀가 서빙을 해 왔는데 모두 휴가를 떠나고 주인 혼자서 일했다.
한국전쟁 때 미군 이동외과병원(移動外科病院)에서 Bartending을 교습 받았다고 했더니 매우 반가워했다. 무엇을 배웠느냐 물어 미국인이 좋아하는 칵테일에 Whisky와 Scotch highball 등을 쫙 이야기했더니 “Very good!”의 연발이다.
어느 날 귀가길에 Gin tonic 한잔을 진하게 마실 생각으로 Earny's에 들렀더니, “Hey, Mr. Kim, bartender 조수 좀 하면 어떻겠느냐”고 묻는다. 일주일 후면 직원들이 휴가에서 돌아오는데 저녁때만 잠깐 도와주면 된단다. OK 했다. 약 10일 동안 미국 Pub의 진수를 배웠다. 군대에서 배운 Mixing은 하수(下手)에 속했다. 군대에서는 그저 타 주면 되지만 여기서는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Dry 또는 Wet, 또는 Double Gin 등 Recipe가 다양하고 섬세했다.
좋은 경험을 했다. 여기서 배운 실력을 더운 한밤에 출출하면 아이들을 다 재워놓고 Stevens 내외, 나, 셋이서 Gin tonic 또는 Tom collins 등을 만들어 정원 잔디 위에서 즐겼다. 비축해 놓은 술이 없으면 술 사냥을 Stevens박사와 나간다.
펜실베니아 주는 주류가게(liquor store)가 오후 7시면 문을 닫는다. 그러나 강 건너 뉴저지 주에서는 10시까지 열어서 살짝 몰래 반입하곤 했다. 술이 주(州) 경계를 넘는 것은 위법이다. 잡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주 경계를 넘을 때는 “Put down your head! Quick! Jin Hyu!(머리 숙여라 경찰 온다)” 같은 장난을 많이 쳤다.
Summer session도 중간쯤 진행되었다. 고국의 아내는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로 안부를 전해왔다.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편지가 도착한다. 한 자 한 자 맛을 제대로 보기 위해 한가한 토요일 밤에 개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지금 같아서는 전화기를 붙들고 살 수 있으련만 당시에는 5분 정도의 통화면 10달러 정도 했다. 10달러면 나의 일주일의 귀중한 용돈이다. 함부로 전화를 걸 형편이 못 되었다.
편지를 접할 때마다 마련 없이 아이 둘을 안겨주고 혼자 훨훨 날아왔다는 것이 못내 죄스러웠다. 그렇다고 미국에 불러들일 수도 없고, 앞으로 학부 졸업 하는데 1년 반, 석 .박사 하는데 5, 6년이나 7, 8년의 세월을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 가족에게 너무 미안하고 무책임하단 생각마저 들었다. 가끔 주말에 초대를 받아 가면 가족 이야기가 많은데 서양 사람들은 정상적인 부부가 2, 3년을 공부 때문에 헤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를 못 한다.
유학기간을 좀 단축할 수 없는가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Stevens 박사 내외도 가족 때문에 방법을 강구하는 데 동정적이었다. 좀 건실한 스폰서를 구해서 가족과 합류해 유학하는 것이 원안(原案)이라고 항상 걱정을 해 주었다. 한국에서 학부를 졸업했으니 기본적 자격은 되고, Lafayette에서 2개 학기 25~6학점은 땄으니 석사진학(MA)에는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다행히 인접해 있는 라이벌 학교 Lehigh University에 Dr. Feaver라는 고전학(古典學) 교수가 계셨는데 Dr. Stevens와는 막역한 사이였다. Feaver교수의 부인도 한국에 갔던 선교사의 딸로 한국, 중국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사정을 상의했더니 곧 회답이 왔다. 9월 신학기에 국제관계학(International Relationship) 석사과정은 가능하나 장학금 사정은 5월로 마감을 했으니 학비지원은 불가능하다는 연락이 왔다. 그때가 벌써 7월 중순이었다. 학교 쪽에서 좀 정신이 빠진 사람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개학을 2주 앞두고 장학금 이야기를 했으니 말이다.
Stevens교수는 곧장 Pascal 교수에게 쫓아가 상의했더니 나의 장학금은 독지가의 개인 기탁이기 때문에 Lehigh로 전환이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다음날 연락이 왔다. 독지가와 상의해서 허락을 받았고 타교에 가면 숙식이 문제인데 그 돈까지 지원을 받기로 했단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이러한 은혜로 지금도 Lafayette 동창회는 열심히 챙기고 있다.
8월 중순 드디어 Lafayette에서의 Summer School은 끝이 났다. 성적은 비교적 좋게 나왔고 걱정했던 English 과목도 B학점이 나왔다. 퍽 다행이라 생각했다. 영어는 주로 작품의 Reading과 Essay 작문이었는데 학기 중간까지는 빨간색으로 떡칠을 해서 나에게 돌아왔다. 선생님이 일일이 잘못된 것을 고쳐서 돌려준다. 이대로라면 학점이 나올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점차 나아지면서 학기말이 되면서는 제법 까만 글씨가 우세해졌다. 이때의 영어작문 실력은 평생의 자산이 되고 있으며 지금도 영문으로 일기를 씀으로서 그 소질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