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집 마련
서(徐)사령관은 졸지에 Homeless가 된 부관이 측은하기도 했고 전셋집에서 연탄가스 피해까지 당한 사실을 알고 도울 방법을 강구하셨다. 공병부장(工兵部長) 정(鄭)중령을 불러 알아보니 미군(美軍) 공병 잉여물자(목재)를 보관하고 있는데 대민(對民) 봉사용으로 불출하고 있다고 했다. 미(美)고문관의 양해를 구해 조금 지원해줄 수 있다고 했고 고문관들은 김 부관(金 副官)의 내집 마련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 곧 O K가 났다.
시내 가까운 곳은 땅이 비싸서 변두리로 나갔다. 등산을 좋아했던 터라 서울 근교의 산과 골짜기는 손바닥처럼 알고 있었다. 특히 북한산의 승가사를 자주 다녔는데, 자하문 밖 세검정 근처가 산수가 수려하고 마음에 들었다. 일요일을 이용해 산책하면서 정(亭)이 있는 바로 개울 물 건너 50평을 계약했다.
토지대(土地代)는 시골에 계시는 장손(長孫)인 진석(秦汐) 형님께서 투자(投資)를 해 주셨다. 아들 하나(高大)와 딸 둘(梨大)을 서울에서 학교를 보내는데 전부터 항상 내가 데리고 있어 주었으면 했다. 마침 기회가 되어 공동투자해서 집을 하나 짓기로 의기투합 하고 곧 건축에 들어갔다. 약 40일의 집중 작업으로 30여 평 방 둘에 마루 하나와 부엌이 딸린 반듯한 집 한 채가 생겨 입주했다.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손수 마련한 나의 첫 번째 Sweet Home 이었다.
얼마 후 북한산 입구 근처에서 서울 방어 기동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서(徐) 장군이 우리 새집을 돌아보시고 흡족해 하셨다. 그 은혜는 지금도 백골난망이다.
친척 여군의 죽음
어느 주말 느지막한 오후, 한강을 넘어 세검정 집으로 퇴근하던 도중 용산에 있는 큰댁에 잠깐 들렀다. 여기에서 의외의 인물을 만났다. 보도연맹(保導聯盟)과 관련해 후퇴 중 총살당한 나의 육주(六周) 당숙의 큰딸 숙자가 여군 복장을 하고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여군 훈련소에서 어제 갓 졸업을 하고 부대배치 대기 중이라고 했다.
여군은 타자 등 많은 기밀서류를 취급하기 때문에 신원조회가 장교 못지않게 까다로운데 어떻게 여군으로 입대했는지 불가사의 했다. 저녁을 같이 먹고 용기를 내서 “숙자야, 어떻게 입대할 수 있었냐?” 하고 물었더니 좋은 보증인이 있었다고 했다.
숙자의 아버지인 육주(六周) 당숙이 6.25 후퇴 때 비명에 가자,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아들 하나는 어머니가 데리고 개가(改嫁)를 하고 저는 이집 저집 친척에게 의지하다가 어느 마음씨 좋은 군인 집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여중(女中) 때 공부도 잘했고 착실한 성격이어서 그 집 아이를 열심히 키워주었다고 한다. 마침 그 군인이 대령으로 의정부지구 방첩대장으로 있으면서 보증을 서 주어 여군으로 입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천만 다행이었다.
오빠가 있는 6관구에 근무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수락을 하면서 오빠 곤란하게 처신을 하지 않겠지? 라는 다짐을 받았다. 마침 우리 고향 출신 김종호(金宗鎬) 중령의 군수참모부에 타자수가 필요하다고 해서 거기에 추천했다. 김 중령에게도 육주(六周) 당숙의 딸이라는 것을 밝혔다.
6관구에는 여군 숙소(宿所)가 없어 개인적으로 미아리 삼양동 꼭대기 싸구려 집에 세 들어 살면서 영등포 6관구까지 출퇴근했다. 그때 다행히 군용 트럭 출퇴근차가 있었다. 4, 5개월 잘 근무하였고 G-4에서도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해서 나는 퍽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는 본부 중대장이 나에게 와서 숙자가 삼양동 셋집에서 자살한 사체로 발견됐다고 한다. 황당했다. 곧 차를 타고 육주(六周) 당숙의 동생 칠주(七周) 당숙의 이태원 집으로 가서 내외를 모시고 현장에 달려갔다. 벌써 헌병대에서 나와 검사를 하고 유서, 일기 등을 모두 수거해 갔다. 군 장의(葬儀)부대가 도착해 완벽하게 입관 절차를 마치고 「앰뷸런스」로 화장장으로 갔다. 유골은 칠주(七周) 당숙이 김포 한강 하류 어디에 가서 뿌리고 돌아왔다. 그날 밤 칠주(七周) 당숙의 숙자 사인(死因)에 관한 풀이에 나는 매우 충격을 받았다.
일은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육주(六周) 당숙은 한학자인 아버지로부터 논어까지 공부하고 중학(中學) 졸업 후 일본 경찰학교에 입학해 일등으로 졸업해서 광주(光州)경찰서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명석하고 유능해서 몇 년 후에는 고등계 형사가 되어 광주 지방의 사회주의자(社會主義者),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 그리고 항일인사(抗日人事)들을 담당 관리하게 되었다.
우리 아버님이 대학을 졸업하시고 잠깐 전라남도 산업과(産業課)에 근무하신 적이 있는데, 그때 우리는 광주에 살게 되었다. 음식을 들고 심부름도 갔고 당숙모와 아이들도 우리를 퍽 반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끔 당숙을 만나면 목에 「호루라기」를 걸고 다녀 그것이 대단한 무기인 것으로 알았다.
얼마 있다 우리 가족은 광양 고향으로 돌아왔고, 당숙 댁은 해방될 때까지 광주에서 계속 사셨던 모양이다. 「모스코」 세계공산청년동맹대표회의에 「호지명」과도 같이 참가한 지하조직과 위장술의 귀재 박헌영(朴憲永)씨는 일본 관헌의 감시를 피해 광주의 외곽 송정리 근처의 한 벽돌공장에서 노동자로 위장해 숨어 있었다. 그러면서 호남 일대의 지하조직을 계속해 나갔고 일급 참모로서 광주의 「인텔리」 사회주의자 박중양 씨와 밀착되어 있었다.
당숙은 오랜 세월 박중양 씨를 감시해 왔고, 예비검속에서도 반드시 잡아 수감하곤 했다. 두 분은 조사과정에서 많은 것을 서로 알게 되었고, 동정이 상호 보호 차원으로까지 발전했다. 해방이 되면서 많은 애국자들을 괴롭힌 죄책감도 있었으리라. 당숙은 드디어 세뇌(洗腦)가 되어 공산주의의 전도사가 되었다.
해방 후 나는 상경하여, 어느 날 다섯째 계주(桂周 : 경찰전문학교 교감, 감찰관) 삼촌댁에서 10여년 만에 당숙을 만나 뵈었다. 매일 오후 「오장동」 삼촌댁으로 출근하다시피 한단다. 계주 삼촌도 당숙의 내방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으나, 점잖게 동생 집에 와서 바둑 몇 판을 두고 가는 형님을 밀어낼 수도 없고, 나를 발견한 일곱째 범주(泛周 : 당시 고려대 경제학과 재학 중)삼촌도 당숙 조심하라고 일러준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많은 좌익이 월북했다. 제주도 4.3 사태, 여순사건(麗順事件) 등으로 지하에 숨어 버리자 기관(경찰과 군 정보기관 등)들은 회유책(懷柔策)으로 보도연맹(保導聯盟)을 만들어 과거의 활동을 털고 자수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각 경찰서 사찰계(査察係)에서 담당 관리해 나갔다.
6.25가 터지자 운 좋은 사람들은 도피했고 소집에 응했거나 검거된 사람들은 대부분 산에 끌려가 총살되거나 바다에 수장되는 등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이렇게 쌍방은 6.25를 계기로 해서 어느 일방이 참살되어야 끝장이 나는 무서운 적개심으로 고정되어 버렸다. 아마도 당숙은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와 있다가 희생된 모양이다.
이야기는 이어져 당숙의 사상적인 대부(代父)였던 박중양 씨의 아들은 서울대학 재학교 중 6.25를 맞아 활발히 활동하다가 9.28 수복 무렵 월북했단다. 이 박중양 씨의 아들이 월북(越北) 후 5, 6년 만에 삼양동 숙자 앞에 홀연히 나타났다고 한다(어릴 때 광주에서 같이 컸다 함).
칠주(七周) 당숙 생각으로는 그가 간첩으로 남파되어서 숙자에게 협조하도록 요구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아마도 숙자는 많은 갈등과 공포를 느꼈으리라 짐작한다. 사상(思想) 때문에 온 가정이 박살이 났고, 혼자서 이 무서운 세파를 헤쳐 나와 겨우 이렇게 안정이 되었는데, 간첩과 동행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모험이요 비극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동안 신세를 진 주변의 좋은 분들 일가친척 등이 다시 쑥대밭이 된다고 생각하니 기가 찼을 것이다. 이런 중압을 견디지 못한 이 처녀는 고민하고, 갈등한 끝에 결국 우울증에 걸려 자살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택했으리라 본다. 이념(理念), 사상(思想)이란 이렇게 잔인한 것이다. 누구든 가만히 두지 않는다. 모조리 끝장을 봐야 한다. 죽어서 자유(自由)를 얻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