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행길로 삼선동 큰댁에서 며칠 지내다 마침 신청해 놓은 AID원조 주택이 준공이 되어 우리 내외는 이사를 하고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청량리 근방 용두동인데 옛날 미나리 밭을 개간해서 조성한 주택단지였다. 시범주택인지라 수도와 전기가 제대로 들어와 당시로서는 매우 편리한 집이었다.
합참(合參)에 전속 온 이후 비서실장의 양해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바쁠 때는 안 되지만 한가할 때는 군복을 입은 채 곧잘 강의도 들으러 갔다. 결강노트는 차석준(車錫俊)군과 김운용(金雲龍)군의 신세를 많이 졌다. 열심히 베껴 쓰고, 그걸로 학기말 시험도 치르며 차질 없이 학점도 땄다. 다만 무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없어 대학 시절의 낭만을 접어야 했다.
합참에 온지 어언 1년이 되자 합참총장 유재흥(劉載興) 장군이 1군사령관으로 발령이 났다. 그때 군의 관습이 특이했다. 군단장급 이상 이동명령이 나면 중국군의 군벌처럼, 부관, 비서진은 물론 핵심 참모들이 대거 같이 이동했다.
대단히 후진적인 양상으로 미군 고문단(美軍 顧問團)도 질색을 했다. 나는 1군사령관 비서실로 전속(轉屬)을 갔고 비서실장은 정승화(鄭昇和 : 육사 5기, 12.12 때 육참총장) 대령이었다. 나의 군(軍) 후견인이던 서국신(徐國信) 대령은 20사단 부사단장(副師團長)으로 가셨다.
주말이면 또 야간열차를 이용해서 원주와 서울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아내는 1주에 서너 번씩 고려대학교에 가서 나의 친구를 만나 노트를 빌려오고 밤샘 필사(筆寫)하고 돌려주는 것이 일과였다. 그 노력의 덕택으로 1년은 무사히 학점을 딸 수 있었다.
그러나 자주 있는 기동훈련과 의무적인 사단급(師團級) 이하 전방(前方)의 근무경력 문제로 4학년 학점을 따는데 2년여가 걸렸다. 전방 근무경력을 위해 20사단에 약 2개월의 근무를 마치고 1군사령부 비서실로 다시 복귀했다. 원주에 돌아와 다소 안정이 되어갔다.
그런데 1군사령부 참모장 박정희(朴正熙) 준장이 육군본부로 부임하고, 28사단장이셨던 서종철(徐鍾喆) 장군이 후임으로 부임하면서 나의 군(軍) 생활이 새로운 궤도를 달리게 되었다. 박정희(朴正熙) 장군의 보좌관이었던 윤필용(尹必鏞 : 육사 8기) 중령은 인수인계 관계로 약 1개월간 김종호(金宗鎬 : 육사 8기) 중령과 서종철 장군을 모시고 합동근무를 하고 있었다.
김 중령은 나의 고향 선배이고 집안으로 따지면 나의 조카뻘로서 가까운 사이였다. 마침 서종철 장군을 모시던 전속부관이 고등군사반(高等軍事班) 교육을 가게 되어 후임이 필요했던 처지였다. 김 중령이 나에게 같이 근무했으면 좋겠다고 종용을 해왔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매이기 싫었고, 앞으로 유학문제도 있고 해서 비서실의 통역, 연락관(通譯, 連絡官)으로 좀 자유롭게 군복무를 마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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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호 / 1926년 광양 출생.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여 전남도지사와 건설부장관을 지냈다. [사진출처 ; 광양시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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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徐 장군께서 나를 부르신다. “같이 일해 볼 생각 없나?” 하신다. 중후한 체격에 예리한 눈매는 나를 압도했다. 이끌어 주실 지도자로서 든든하고 신뢰가 갔다. 그날부터 봇짐 싸 짊어지고 참모장 관사(官舍)로 입주했다.
이래저래 4, 5개월이 흘러갔다.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에 徐 장군과 함께 와서 주말을 보내고 원주로 돌아가곤 했고, 간혹 심부름으로 서울에 일박(一泊) 하고 돌아갈 때도 있었다. 이산가족이 따로 없었다. 아내에게 대단히 미안했다. 당시의 군(軍) 장교 생활이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주말 어느 날 서울 갈 날짜가 안됐는데 “부관, 서울 가자. 차 대기시켜라!” 하신다. 표정이 대단히 무거워 보였고 매우 침통했다. 운전병 金 下士를 대기시키고 뒷자리에 앉았다. 서울로 달리는 3시간 동안 입도 벙긋하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인지 물어볼 수도 없고 심기가 매우 안 좋으신 것 같았다. 청파동 댁에 도착할 때까지 무언의 시간이 흘렀다.
“부관, 집에 가 있게나, 연락할 때 까지.” 한마디 하시고 집으로 들어가신다. 참 답답한 일이었다. 김 하사와는 하루 한두 차례 연락을 하고, 원주의 김 중령과는 딱 한번 전화통화를 했다. 김 중령도 답답해 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병가(病暇)를 내신 것을 확인했다.
나는 다시 학교에도 가보고 한가한 나날을 보냈다. 서울 도착 약 2주쯤 후에 육군본부의 군사발전국장(軍事發展局長)으로 발령이 나셨고 이제 원주 1군 생활이 끝이 났다.
1군사령부 근무의 에필로그
1958년 늦은 가을 1군사령부는 예하 전 부대가 참가하고, 공군과의 합동 작전 야전군사훈련(野戰軍事訓鍊)이 시작됐다. 훈련이 마무리 되는 날 이승만 대통령이 퇴계원 북방에 있는 야전훈련사령부(野戰訓練司令部)를 시찰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이 대통령이 논산훈련소(당시 훈련소장 양국진(楊國鎭) 장군)에 시찰 갔을 때 훈련소장의 환영사가 대단히 마음에 들어 극찬을 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1군사령부도 이에 질세라 비서실 장교 중 가장 계급이 낮은 나를 군용기(軍用機) L-19에 태워 논산으로 급파한 것이다. 원주비행장에서 출발 오후 3시 무렵 논산에 도착했는데 원고 복사 등등 일이 느리게 처리되는 바람에 오후 5시경 출발하게 되었다.
상공에서 보는 늦가을 계룡산의 단풍은 너무 아름다웠다. 한강을 건너 서울 인근을 통과할 때에는 해가 서쪽으로 완전히 기우는 시각이었다. 계속 날아간다. 땅거미가 깔리는 시점에 “어, 어.” 하는 소리가 난다. 앞좌석에서 열심히 조종하던 「파일럿」대위가 길을 잃은 모양이다.
고도를 낮추더니 붕- 하고 한 바퀴 선회하더니 착륙을 시도한다. 간이비행장 같은 풀밭에 착륙을 했는데 병사 두 명이 M1총으로 공포를 쏘면서 달려온다. 황당한 순간이었다. 퇴계원 훈련사령부에서 한참 북쪽인 DMZ에 가까운 금화(金化) 근처의 용도 폐기된 최북방(最北方) 비행장이라 했다.
병사들은 휴전선을 넘는 불온한 비행기로 알고 추격했다는 것이다. 조종사는 사정을 설명했고 다시 이륙을 했다. 다행히 이‧착륙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가뿐하게 공중에 솟아올랐다. 미군이 만든 L-19는 참으로 잘 만든 병기(兵器)라고 생각했다.
공중에 올라와서야 원주비행단과 연락이 됐는데 퇴계원 간이비행장은 야간 유도가 안 되기 때문에 원주로 들어오라는 명령이었다. 다시 4, 50분을 비행해서 겨우 원주 큰 비행장에 착륙했다. 잠시 마음의 평정을 찾고 짚차로 2시간을 달려 밤 10시경 육사(陸士) 근처 퇴계원에 설치한 야전훈련사령부에 도착했다. 길을 잃고 5,6분 정도만 계속 비행했더라면 월북할 뻔했다. 아찔한 경험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