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진학으로 상경하여 첫 학기는 돈암동 경동고등학교 정문 근처의 정주(廷周) 숙부님 댁에서 기거를 했다. 내가 쓰던 방은 사랑채인데 얼마 전까지 서울지검 차장검사로 계셨던 김치열(金致烈)씨가 사용했던 방이다. 그분의 가족이 서울로 이사 오기 전이라 가까운 동창생인 숙부님 댁에서 신세를 졌다.
두 분의 평생 인연이 각별했다. 김치열 선생은 경북고(大邱高普)를 나오시고 일본중앙대학교에 진학하셨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워 거의 고학을 하다시피 하셨다. 학부에 진입하면서는 사법고시(고등문관시험)를 준비하느라 방학 때는 고향에도 돌아오지 못했다. 낮에는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東京 神田에 있는 나의 숙부님 하숙집에서 신세를 졌다.
「신정관(新正館)」이라는 반듯한 여관이었는데 방에 전화까지 있었다고 하니 상당히 사치스러운 학생 생활이었던 모양이다. 방학 동안에 김치열 씨가 독방을 쓸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했고, 드디어 고시에 합격하셨다. 이 두 분의 우정은 참으로 본받을 만 했다. 인생의 조언자로서 그리고 상호(相互) 후원자로서 격조(格調) 있는 관계를 유지하셨고, 또한 두주(斗酒)를 불사하는 애주가들로 서로 어려움을 헤아려 주는 상대였다. 두 분은 은퇴 후에도 등산, 골프를 같이 즐기시고 치매도 같이 겪더니 2년 터울로 세상을 뜨셨다. 평생우정은 이런 것인가 생각한다.
나는 숙부님 댁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돈암천을 따라 걷다가 안암동 애기능을 가로질러 학교에 다녔다. 약 30분 정도 걸리는 도보등교인데 많은 학생들이 그 길을 택해 학교에 다녔다. 좋은 운동이 되는 거리와 시간이었다. 학교로 가는 다른 교통편이 없었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전차로 성동역이나 청량리역까지 와서 약 20분을 걸어 학교에 오는 형편이었다. 서울상대 학생까지 합류하면 아침의 학생 물결은 대단했다.
동생 영자는 이대(梨大) 기숙사에 입사했으니 모든 숙식과 통학이 일거에 해결됐다. 그러나 효창동 숙대(淑大)는 기숙사가 없어 지방학생들은 전부 하숙, 자취나 친척집에서의 기숙 등에 의존했다. 숙이는 다행히 학교 근처인 마포 도화동에 있는 외삼촌댁에서 하숙을 하고 도보로 학교에 다녔다. 삼촌 이종필(李鍾弼)씨는 체신부에 다니셨는데 우리 아버님하고도 가까운 사이였다. 삼촌댁과는 지금도 형제 이상의 정으로 후세들이 서로 친하게 내왕하고 있다.
학교 시험 때가 아니면 매 주말에 숙이와 「데이트」를 했다. 종로 화신 근처의 다방 또는 식당에서 더러는 마포 삼촌댁으로 직접 찾아가 밥을 얻어먹고 돌아오곤 했다. 전차길이 좋아서 다니는 데는 퍽 편리했다.
그런데 어느 초봄 철 늦은 눈이 온 시내에 왕창 내렸다. 전차, 버스 할 것 없이 모든 교통수단이 마비가 된 것이다. 처녀 집에서 잘 수는 없고, 저녁을 얻어먹고는 걷기 시작했다. 신발은 방학이 끝나고 상경하는 학생에게 으레 부모님이 선물하는 새 가죽신이었다. 3월 초인지라 진눈깨비로 변해 길이 질퍽질퍽 해졌다. 서대문쯤 걸어오니 신발은 완전히 물에 젖어 스며든 물로 부걱부걱 소리가 나며 무게가 한 짐이 되었다. 차는 잡을 수 없고 계속 걸어 동대문, 신설동 그리고 약 세 시간을 걸어 안암동 하숙집에 당도하니 통행금지시간 직전이었다. 젊음이 좋기는 좋았다.
신발을 적당히 물기를 털고 연탄부엌 화덕 옆에 놓아두었다. 이게 웬일인가 다음날 아침 신발이 딱딱한 마분지처럼 굳어 발이 들어가지 않는다. 새 가죽신 한 켤레를 완전히 버린 것이다.
새 신발이 이렇게 거덜이 나도 주말이면 또 만나고 싶다. 교통이 불편했기 때문에 수도(首都) 서울에서 갈만한 곳은 많지 않았다. 전차로 한강에 가서 보트 타기 그리고 동대문 청계천 옆에 있던 교외전차를 타면 뚝섬에 간다. 보트타기 아니면 포플러 숲에서 돗자리를 사서 지난 일주일의 회고담을 교환한다. 가끔씩 돈암동 종점에서 아리랑 고개를 걸어 넘어 정능에 이르러 맑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노는 재미 등이었다.
가을이 되면 덕수궁 돌담을 끼고 산책하는 것은 당시 우리 학생들의 필수 코스였고 봄 벚꽃놀이는 창경원 동물원에서의 야간개장을 마음껏 즐기는 것 정도였다. 야유회의 단골은 도봉산, 수유리 정도였는데 가까운 친구와 그들의 애인들과 함께였다.
숙부님 댁에서의 하숙은 첫해 1학기 동안 신세를 지고 여름방학 후 2학기에 상경해서는 안암동 개운사(開運寺) 옆에 하숙집을 구해 입주했다. 룸메이트는 부산고등학교 출신인 홍선표(洪善杓) 군과 함께 했다. 홍군은 언론인 지망생인데 한문(漢文)에 능하고 신문을 들었다 하면 광고란까지 완전히 정독하는 습관이 있었다. 나이 차이가 많고 해서 언제나 나를 김형으로 불렀다. 부산의 유명한 洪 도선사(導船士)의 아들이었으므로 학자금도 넉넉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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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국에 대한 토론도 자주 했고, 60년도 거사모임의 핵심 멤버들7대 국회에 막 등원했던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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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식사도 하숙집에서 제공했으므로 언제나 우리 둘에게는 식객이 뒤따랐다. 동기인 윤석만(尹錫萬)군이 단골손님이었다. 尹군은 학자(學資)에 어려움이 있어 용산동 언덕에 있는 전쟁고아원의 선생을 하면서 식생활을 해결했기 때문에 도시락을 지참할 형편이 못되었다. 2인분을 가지고 3명이 나눠 먹는 것이 우리 점심 방식이었다.
하숙집 여주인은 40대 초반의 시골아줌마였는데, 마음이 너그러워 식객이 있어도 별 불만이 없었다. 애기 아빠는 어느 건설업체의 하도급 반장 정도 되는 분인데 술보였다. 수틀리면 서방님을 따끔하게 몰아붙이는 담력이 있는 여장부였다. 다만 반찬솜씨는 별로였는데 그때 꽁치와 무말랭이 무침을 하도 많이 대접을 받아 지금도 그것만은 과히 좋아하지 않는다.
안암동 하숙은 2학년 2학기까지 계속되었다. 하숙비가 좀 넉넉히 올라오면 신설동, 동대문 사이에 있는 그 유명한 형제추어탕 집에서 막걸리를 곁들여 포식을 하고 몸이 쇠약해 졌다 싶으면 동대문 근처 청계천 판자촌에서 보신탕을 들었다. 우리들끼리는 개장 또는 보신탕이라고 부르는 대신 「문화탕」으로 통했다.
집에서 매월 송금되는 학비는 절약해 쓰면 충분했다. 그러나 청춘사업과 친구들과의 회식을 위해서는 용돈이 필요했다. 나에게는 돈벌이 수단이라고는 영어 밖에 없으니 영어 번역이나 미군부대에 가서 일해 주는 방법이 있었는데 다행히 전방 美軍 이동외과병원의 김용규(金龍圭) 兄의 소개로 美 8軍 시설본부에서 야간근무를 하고 두둑한 용돈을 벌어 썼다.
따라서 착실히 공부하는 학생이라기 보다는, 학기말 시험이나 열심히 치러 빨리 졸업하는 일이 최대의 목표였다. 공부는 장차 따로 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하나의 통과 수순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기회만 있으면 가까운 친구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시사 토론을 하고 우리나라가 나아갈 바 왕도가 무엇이냐 등을 밤을 새면서 토론을 했다. 자유당 이승만 정부에 대한 비판도 많이 했다.
단골 논객은 홍선표(洪善杓), 김효곤(金孝坤), 권호순(權昊純), 이상격(李相格), 차석준(車錫俊), 하재윤(河在潤), 곽장섭(郭長燮), 윤석만(尹錫萬)에다 가끔 김운용(金雲龍), 이종식(李鍾植), 백안기(白安基), 이성곤(李性坤), 그리고 강기홍(姜基弘), 채홍식(蔡弘植) , 이강두(李康斗)군 등이 참여했다.
모두 대학동기들이다. 이 친구들 일부는 우리가 모의했던 1960년의 거사의 핵심인물들이 되었다.
대학생활 중 또 하나의 재미는 학기말 시험이 끝나면 집단으로 귀향을 하는 것이다. 약속이라도 한 듯 경부선(京釜線) 야간 급행열차에 김천, 상주, 대구, 안동, 부산 출신 학생들이 몽땅 탄다. 숙이도 같이 동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열차 한 칸을 점령하다시피 우리들 독무대가 된다.
특히 대구 출신 차석준 군은 해박한 지식으로 종교, 문학, 철학을 넘나들며 우리들에게 교양을 넣고 「코미디」에 가까운 입담으로 잠을 단축시켰다. 동행한 여학생들을 홍당무로 만들기 일쑤였다. 차 군이 대구역에서 하차하면 비로소 잠이 들고 아침 7~8시쯤 되면 코 밑이 새카만 채 부산역에 내리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