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 대학진학 (36회)

만남

학교의 수업만으론 아무래도 수학(數學)이 부족할 것 같아서 보수동에 있는 영수학원에 등록하고 하루 두 시간씩 수학 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순열, 조합, 고등수학, 미분, 적분으로 사다리 타는 공부를 했다. 저녁 일곱 시에 시작하여 아홉 시에 끝났다.

학원을 마치고 서대신동으로 올라오는데 같은 시간에 언제나 약간 고개를 옆으로 기웃 숙이고 열심히 걸어가는 여학생 하나가 있었다. 몇 차례 학원에서 본 듯한 모습이다. 관심이 있었다. 밝은 학원 교실에서 얼굴을 확실히 익혔다. 약간 큰 키에 통통하고, 피부가 몹시 고왔다. 그러나 눈 끝이 약간 치켜 올라간 것이 좀 쌀쌀맞고 성질 깨나 있어 보이기도 했다. 땅바닥만 쳐다보고 걸어가는 여학생이라 좀 소심하지 않나 걱정도 된다.

약 한 달 정도 후 바짝 뒤쫓아 가면서 말을 걸어봤다. 그러나 잰 걸음으로 그냥 앞으로 간다. 여전히 약간 고개를 비틀고 응답은 없다. 부산고녀(釜山高女) 교사(校舍 : 당시 스웨덴 병원으로 쓰고 있었음) 뒤 갈라지는 골목길 어귀에서 약간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듯 하더니 그냥 계속해서 집 쪽으로 간다. 집을 확인해 두었다. 서대신동 1가 이다. 이런 미행이 약 1주일 쯤 계속되자 학원 교실에서도 나를 좀 의식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거부하는 표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걸어가면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부산고녀 졸업반이고 대학 진학을 위해 보충수업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내 소개도 간단히 했다. 이것저것 이야기하다 보면 20분 거리가 금방 끝이 난다.

하루는 조금 더 걸어 우리 집을 보이고 싶었다. 순순히 따라온다. 집 앞에 서서 대충 설명하고 우리는 집도 없고 관사에 산다고 했다. 그쪽은 집이 있느냐고 했더니 자기 집이라고 고개를 까딱 한다. 집까지 에스코트해 주고 돌아왔다.

이 무렵 나의 이성에 대한 생각은 확고했다. 우선 진학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된다. 교제는 상호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어느 일방이 끌려 소위 짝사랑으로 가는 형태의 관계는 안 된다. 그리고 내 나이가 장가들만 하니 교제가 풋사랑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배필로서 교제를 하고 싶다. 극히 실용주의적인 결혼관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성 때문에 상념에 젖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다. 그저 내 나름대로 정해 놓고 장기전으로 돌입하는 것이다.

둘 다 내면적으로야 적극성이 없었을까 만은 표면적으로는 느긋했다. 딴 데로 방향을 바꾸지 않도록 은연중 책임을 지는 표현도 할 필요가 있었다. 例로써 대학 진학 때 무슨 학과를 전공하겠느냐 묻는다. 대답이 가사(家事) 또는 약학(藥學)이라 나오면, 그것도 좋지만 나의 포부는 장차 정계(政界) 아니면 외교(外交) 쪽에서 활동하고 싶은데 그쪽은 영문학 분야도 생각해 볼만 하지 않느냐는 등 이렇게 시작된 우리의 사귐은 비교적 순탄하고 느긋하게 진행이 되었다.

그녀는 바로 밑 나의 여동생 영자와 같은 나이에 같은 학년으로 당시에는 남녀 간에 대충 3, 4세 차이를 선호했다. 나이 차이도 적당했다. 따라서 우리 둘 사이에 역기능이 발생할 만한 꺼리도 별로 없었다.(종교, 성씨 등등)

약간 세월이 흘러 상대에 대한 확신을 가진 후부터 이제 진학에 도움을 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수학, 화학은 별 걱정이 안 된다고 했다. 잘됐구나 하고, 일주일에 5일간 5장의 영어시험 문제를 작성해서 전달하는 것이다. 당시 우리 집에서 일하던 아주머니가 배달 책임을 지고 수고했다.

당시 일본으로 다니는 외항선을 타는 친척에게 부탁하여 일본의 전년도 각 대학에서 출제했던 시험문제집 영, 수 문제집을 구해보곤 했다. 이것을 참고해서 시험문제를 출제하고 처음 한두 달은 채점까지 해 주었다. 채점을 해보니 거의 만점이었다. 자기 실력의 허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친구들하고 열심히 했던 모양이다. 여하튼 나에게도 공부가 되고, 그녀에게도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그 당시 막판에는 일주일에 한, 두장 해보고 버렸다는 이실직고가 있었다. 다른 것도 할 게 많고 힘이 들었다고 한다. 늘그막에 고해를 했으니 야단칠 힘도 없다.

대학진학

김문수 군과 서로 격려하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처녀 집에서도 일차(一次) 대학에 낙방한 학생을 좋아 할리 없고 불합격 한다면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이다. 이런 것들도 밤샘하는데 촉진제가 되었다.

우리 가문은 전통적으로 보성전문(普成專門),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와 인연이 깊었다. 1932년 보성을 인수한 인촌 김성수(仁村金性洙) 선생께서 안암동에 새로운 캠퍼스를 조성하실 때다. 민족학교 보전(民族學校普專)이라는 기치 아래 인촌(仁村) 선생께서 주변에 계신 가까운 민족지도자 몇 명과 일행이 되어 남북 전국을 순회하시면서 모금운동을 전개하신 일이 있다. 이때 우리 고향에 오셔서 백부님과 알게 되셨고, 우리 집안에서 많은 기부가 이뤄졌고 그때부터 인간적인 관계가 꾸준히 유지되었다.

▲ 보성전문 때 건립한 고려대 정문과 그 사이로 보이는 본관

인촌 선생님은 교육에 관한 한 우리 집안의 「멘토」역할을 해주시고 이를 계기로 아버님을 비롯하여 숙부님 그리고 형님들이 줄줄이 일본에 가서 신학문을 접하게 된다. 따라서 재주만 되면 국내에서는 고려대학교 이외의 선택이란 있을 수 없었다.

드디어 모집요강이 발표되었다. 이것이 웬일인가. 고대 정치과는 수학이 빠지고 국어, 영어 그리고 과학(물리, 화학, 생물 중 택 1), 단 세과목이다 시원섭섭했다. 괜히 고생만 했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수학은 과락(科落)이라도 면하기 위해 일 년 내내 열심히 했던 것이 천만 다행이다. 우선 미, 적분까지 했으니 이 어려운 분야의 판도를 최소한 짐작할 수 있고 왜 필요한지를 알게 되었다. 최근 손자들에게 초등학교 수학을 가르쳐 보면서 그때 배웠던 공리(公理)가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느낀다.

여하튼 1955년 1월 시험날짜가 되어 중앙고교(中央高校) 돌집에서 시험을 치렀다. 음산한 겨울날씨였으나 다행히 춥지는 않았다. 결과는 비교적 만족스러웠고 나의 사촌 진호(秦皓)도 막 시험을 보고 나오는데 마주쳤다. 반가웠다.

약 1주일 후에 방이 붙었는데 합격이었다. 나이도 있고 해서 재수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후기대학에 원서를 낼까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주변의 시선도 있고 ‘안 되면 유학이라도 가지’ 라며 후기에는 지원하지 않았다.

나의 동생 영자는 이화여대 체육과(무용에 특기가 있었음)에 그리고 Miss 文은 숙대 약학과에 합격했다. 본인은 이대 약학과에 가기를 희망했으나 완고하셨던 아버님이 절대 반대하셔서 학교를 마지막 순간 바꾼 것이다.

그 당시 1954년 말경, 제대한 해군대위라고 속여 상류층 여성 70여명을 농락한 ‘박인수 사건’이 있었다. 이대(梨大) 학생이 관련된 것으로 일부 언론에 보도되어 시골의 구식 아버지, 어머니들은 이대에 딸 보내면 망가진다고 생각하여 절대 안 된다고 반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