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겨울 방학이 왔고 꾸준히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 고향 이웃인 하동에서 온 김문수(金文洙) 군이 나와 같은 학급에 있었다. 나와는 일가이고 동생 겸 친구로서 가까이 지냈다. 저도 진학준비를 하고 있어 같이 공부하기로 하고 우리 집에 초빙했다. 그는 밥만 먹으면 우리 집에 와서 공부하고, 새벽이면 하숙하는 누나 집으로 돌아가는 일과를 졸업 때까지 되풀이했다. 나의 영어가 문수 군의 대학 진학에 다소 도움이 되었으리라 본다.
드디어 졸업반 3학년이 되었다. 교무실에 볼일이 있어 들렀더니 서양인 한 분이 우리 영어선생님 책상과 마주 보고 앉아 계신다. “김군, 인사하게.” 하신다.
「코니엘」선생님이고 미국 메인 州(캐나다 국경 쪽의 목재로 유명한 州) 출신이며, 보스턴대학(University of Boston)을 나왔다고 소개해 주셨다. “This is Jin Hyu Kim, and glad to meet you, sir.” 라고 말했더니 벌떡 일어나며 무척 반가워했다. 1년 후배인 조 군의 소개로 학교에 모셔온 분이라고 했다. 영어회화를 담당한다고 했다. 반가운 일이었다. 회화가 원만하게 통하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으며 배갈 한잔씩을 했다.
이야기인즉, 한국전쟁 중 보스톤大 3학년 휴학 중인데 영장이 나와, 사병 기초훈련 후 후반기 헌병학교에 가서 졸업하고, 헌병하사관으로 부산항만 사령부 헌병부에 배치되었다고 한다. 별다른 재주가 없어 순찰이나 범죄 수사에 끼지 못하고 「장교 클럽」에서 보초만 서다가 1년 의무복무 연한이 지나 귀국, 제대했다는 자기소개였다.
솔직한 것은 좋은데, 좀 끊고 맺는 데가 없어 느슨한 맛이었다. 듣자하니 자고 먹고 할 자리가 마땅치 않고 우선 軍 헌병시절 알고 지내던 「하우스 보이, 쇼리(나의 후배)」집에서 우선 신세를 지고 있는데 세 사람이 한 방을 쓰고 있어서 대단히 어렵다고 했다.
다음날 교감선생님이 좀 보자고 해서 갔더니 「코니엘」선생님 걱정을 하면서 방법이 없겠느냐 하신다. 우리 부모님께 말씀드려 주면 교장선생님이 아버님께 연락을 하실 것이라 한다.
참 딱했다. 집에 가서 말씀드렸더니 현관 옆에 응접실을 쓰게 할 수는 있겠으나 식사가 문제라고 하셨다. 다행히 「코」선생은 점심과 저녁은 자신이 해결하고, 아침 한 끼는 우리 집에서 공동 취사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입주하게 되었다. 아침 한 끼라고 하지만 그때 당시 주스, 오트밀, 시리얼, 베이컨 등 미국식 아침식사(American breakfast)에 필수적인 식품은 부산 국제시장의 암거래상들이 취급하고 있으나 아주 고가여서 일반인은 사먹기 힘든 시절이었다. 겨우 계란과 토마토, 감자 정도를 어떻게 이용해서 끼니를 때우지만 참말로 식사 해결이 어려웠다.
5, 6개월 우리 집에 모시는 동안 나는 영어회화의 연습, 토론의 기술(debate) 등 많은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Boston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기 때문에「역사와 정치」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문제 특히 중공(中共)문제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나 중국이 강철 1,000만 톤을 생산하게 되면 동양의 판도가 달라질 것이라고 하는 둥 상당히 사회주의에 대하여 많은 언급을 해왔다.
나와는 공산주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에 관해 많은 토론을 했다. 그리고 1929년~1937년 미국의 대공황(大恐慌)에 대하여 상당히 비관적(悲觀的)으로 말했다.
자기 아버지가 「메인」주(州)에서 아일랜드 이민으로서 벌목공으로 일해 왔는데 실직하고 집에 먹을 것이 없어 고생했던 이야기를 자주 했다. 어릴 때 어느 따스한 봄날, 배는 고프고 먹을 것은 없고 양지바른 데를 한참 쳐다보는데 제비꽃이 많이 피어 있었더란다. 이것 됐다 하고 제비꽃을 꺾어 열 개씩 묶어 부케를 만들고 읍내까지 10里를 걸어가서 그것들 모두를 5센트에 팔아 크림빵 하나를 사서 허기를 때웠다는 이야기 등을 하며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최소한 실직하고 굶주리는 자는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는데 가끔 “종교는 아편 중독과 같은 것인데 가톨릭병원에 가보면 그 유능한 의사, 간호사들이 마리아상(像) 앞을 지날 때마다 무릎을 살짝 구부리면서 존경의 표시를 하는 것을 보면 불가사의 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등 자신도 많은 갈등을 겪는 것이다.
그는 호인이고 인정 많고 착한 사람이었다. 다만, 술이 취하면 내면의 어떤 갈등 때문에, 다소 자학하는 성미를 보일 때가 있었다.
내가 보기에 선생님의 사상적 여정은 비교적 간단했다. 우선 가정이 어려웠으나 아이리시(Irish : 미국에 이민 온 아일랜드인) 1세인 아버지는 아들 하나만은 정식 교육을 시켜보려고 많은 애를 썼다. 「메인」주(州)는 미국에서도 가장 낙후되고 오지였으며 주립대(州立大)가 있었으나 신통치 않았던 모양이다. 아들을 철도와 뱃길로 상당한 여행 끝에 도달할 수 있는 Boston으로 유학을 보낸 것이다.
2차 대전(大戰) 후 곧이어 미국은 평화주의(平和主義)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평화주의는 국제사회주의(國際社會主義)와 손쉽게 접목되어 미국 진보세력의 온상인 Boston, 메사추세츠州 일대의 대학가를 휩쓸고 있었다. 오지(奧地)시골 출신의 순수했던 학생이 미국의 대도시에서 접한 여러 가지의 모순에 회의를 느끼고 따라서 캠퍼스의 새로운 사조(思潮)에 물들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정치학, 사회학, 철학, 역사학 등 인문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학도들은 진리, 평등에 관해 언제나 고민하게 된다. 누가 독서회라도 소집하게 되면 간단하게 수십 명이 모이게 된다. leader는 성분이나 능력을 가려서 조직(組織)에 나서고 「공산당(共産黨)」이라는 붉은 어항 속에 집어넣고 계속 이념(理念)의 사료를 넣어주면 이렇게 일은 간단하게 끝나고 또 조직이 새끼를 치면 기하급수적으로 조직과 인원이 늘어날 수 있다.
코니엘 선생도 이런 과정에서 어린 나이에 당(黨)에 가입하고 사상교육(思想敎育)을 계속 받은 것이다. 이때 어떤 일로 해서 휴학하는 사이 병역소집으로 군인이 되어 한국에 와서 일 년 복무하게 된다.
제대 후 귀국하여 학교에 복학해보려 하니 과거의 활동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그 시기에는 한국동란 등으로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와 공산주의(共産主義)가 도처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던 때이며 그 유명한 「매카시즘」이 미국정계 정가(政街)와 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줄 때이다. 이 소심한 분이 잠깐 그 소용돌이를 피해보려고 자신이 아는 유일한 외국, 한국의 부산으로 입항한 것이다.
나는 바로 그 이념(理念)으로 고통 받은 사람인데도 선생의 처지를 생각해보니 동정심도 생기게 되었다. 이념 토론을 할 때는 이제 상대방의 이념적(理念的) 고비를 너무 잘 알고 다음 이야기로 무엇이 나올 것인지 다 알게 되는 처지에 이르니 우리 두 사람의 이념 갈등은 갈등이라기 보다 하나의 Joke로 변해가서 편하고 재미가 있었다.
내 밑에 동생 진문이가 6~7세 때인데, 한참 장난이 심하여 「코니엘」선생님만 보면 「헤딩」을 하는 바람에 별명을 북진(北進)이라고 지어 주셨다. 왜냐하면 이승만 박사가 시도 때도 없이 북진 즉, 호전적인 발언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