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에 접어들면서 그렇게 춥고 고단한 겨울이 서서히 물러가고, 따스한 날이 시작되었다. 주둔지 바로 앞에 국도가 있었다. 매일 젊은 거지 떼가 구걸을 하면서 북으로 북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일부는 친구의 등에 업혀 가는 사람도 있고, 거개가 동상에 걸려 절뚝거리며 가는 것이다.
부대 사람들이 「레이션」을 나누어 주거나 양말, 장갑을 그들에게 전해 준다. 부산, 대구, 밀양, 거제 등지에서 귀가하는 국민방위군의 행렬인 것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참상이었다. 걸어가기 힘든 사람들은 우리 부대 의무실에 데리고 와 응급처치를 해 주었다. 위생실 선임하사 Papas 는 연신 “갓뎀, 갓뎀”(‘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하는 표현이었다) 욕을 하면서 알콜로 닦고 연고를 바르고 붕대로 동여매 주며 치료해 주었다. 검푸르게 언 발가락과 손가락 등을 절단해야 할 정도로 악화된 환자도 많았다.
눈물 없이는 차마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모두 행선지가 북쪽이다. 원주, 횡성, 홍천, 평창, 영월 등지에서 1.4 후퇴 때 방위군 요원으로 남하하다가 군(軍)에서 제대로 관리, 보호를 해 주지 못해 이 지경이 된 것이다. 무책임과 비인도적 처사의 극치였고, 6.25 전쟁 중에 일어났던 우리 군(軍)의 최악의 오점이요 수치였다. 그 후 후방에 가서 안 사실이지만, 이러한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준장(金潤根 准將)이 사형을 당했다.
방위군 유지를 위해 나온 국가 예산과 미군 지원이 몽땅 몇몇 방위군 간부에 의해 횡령, 착복되었다. 그들은 생긴 돈으로 매점매석을 자행해 일시 대구시내에 한지(韓紙)가 동이 났다고 한다. 부정부패의 극치였다. 많은 불쌍한 장정들을 죽이고 영원히 신체적, 정신적인 불구로 만든 것이다. 많은 인간을 고통주고, 대죄를 짓고도 무사하리라 생각했을까, 참말로 어리석은 것이 인간인 것 같다.
후일담이지만 1968~69년 경 국무총리실 민원담당 비서관으로 재직하던 시절이다. 외모도 얌전하고, 얼굴도 아주 예쁜 한 처녀가 찾아왔다. 자신을 방위군사건의 김윤근 장군의 딸이라고 소개하면서 생활이 곤궁하고 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한다면서 도와줄 것을 눈물로 호소하는 것이다. 내가 모시던 총리님과 생전의 자기 아버지와의 친분 때문에 왔다는 것이다. 그녀를 보며 인륜에 반하는 죄를 지으면 후손에게도 그 업보가 돌아간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1951년 4월 중순, 드디어 서울이 수복되고 전선도 38선 주변으로 서서히 정돈되면서 우리 부대를 구성했던 서울 경찰관들의 원대 복귀명령이 내려졌고 부대는 자동 해체되는 운명이 되었다. 미군은 10군단 예하 4사단에 전속되고, 통역요원 우리 3명은 배(裵)중령 부대로 전속 났다는 것이다. 우리 세 사람은 모두 배 중령 부대에는 가기 싫어했다.
밤중에 우리 세 사람은 부대 선임하사 켄. 킴(Kim) 막사에 불려갔다. 요지는 “세 신사분께서는 학생 신분이고 계속 공부하는 것이 본분인 것 같다, 내일 아침 수송편을 준비할 테니 새벽 6시에 떠나도록 해라” 하는 것이 아닌가. 시원섭섭했다. 탈출 시키는데 장교가 개입하면 곤란하니 선임하사가 총대를 멘 모양이다. 물론 렘지, 클라크 그리고 고드프리 등 장교와 천세기 대장의 사전 모의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왜냐하면 우리 3인의 여행증에는 렘지 대위의 서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 6시 정확하게 식당 앞에 쓰리쿼터(쓰리쿼터 짚차와 GMC트럭 사이의 중형 화물차)한대가 대기하고 있다. 세 사람은 신속히 승차했다. 앞 운전석에는 Mess Sgt.(식당 선임하사), 그리고 옆에는 총을 든 또 하나의 미군 병사가 자리 잡고 달리기 시작한다. 매일 새벽 부대 식량 수령차가 후방 충주지방으로 달리는데 방향은 그쪽이었다. 가끔 일방통행 지점 헌병초소에서 일시 정지하는 경우 외에는 계속 앞으로 달린다. 우리가 처음 훈련받고 북상했던 루트를 따라 그대로 달린다.
어느덧 충주, 문경새재, 그리고 안동 시내를 지나 낙동강 쪽으로 달린다. 처음에는 많이 가야 충주 정도에서 각자 알아서 가라고 내려놓을 줄 알았다. 그것이 아니었다. 고락을 같이 한 전우애란 이런 것인가 생각했다.
오후 한시쯤 해서 대구 역전에 내려놓으면서 “Guys, good luck!” 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린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야만의 세계에서 문명의 세계로 우리 몸이 던져진 것이다. 믿어지지 않는다. 다행히 김용권 선생의 가족은 청주에서 대구에 피난 내려와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댁에 따라가서 2, 3일 신세를 졌다. 연락장교단에도 가보고 육본(陸本)에도 들러 친구들을 만났다. 많은 통역장교들이 육본 소속으로 미군의 작전교본, 야전교본 등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데에 투입되고 있었다.
대구에서 열차를 얻어 타고 부산에 내려갔다. 수소문 끝에 우리 가족들이 동래 온천장에 있는 우체국 2층 두 칸을 빌려 피난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그리 찾아 갔다. 오래간만의 가족 상봉이었다.
다행히 교통부 셋째 숙부님의 가족과 함께 배당된 트럭으로 비교적 편하게 남하하셨고 숙부님은 부산지방철도국장으로 계셨다.
그런데 이 일을 어찌할꼬! 같이 피난을 내려온 백부님 내외분과 막내가 고향길 연락선을 타고 가시다 다대포 근처에서 배가 침몰해 세 분 모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소위 창경호(昌慶號) 침몰사건인데, 정원의 몇 배를 승선시켜 일어난 참사였다. 우리나라 선박 조난사 중에서 가장 많은 인명피해가 났던 사건이기도 하다.
배를 인양해 시신을 수습했는데, 막내아들이라도 살려보려고 당신들은 그대로 옷을 입고 계셨고, 아들만은 옷을 벗기려고 사력을 다 했는지 사촌은 팬티만 입고 있었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