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숙부의 청년시절 (150회)
  제19장 나의 집안과 외가

두 할아버지는 망명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고, 민족정기의 꾸준한 재생 순환을 위해 종교를 가지게 되었다. 
 
민족 전통종교라고 하는 「대종교(大倧敎)」인데 유불선(儒佛仙) 3도(道)를 망라한 기도(祈禱), 세심(洗心)의 예법으로서 서운(棲雲)께서도 망명, 귀환 후에도 황죽리 집 뒤뜰에 조그마한 제당(祭堂)을 두 개 지으시고 수시로 정한수와 촛불을 준비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어릴 적 나는 신기하게 생각했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나는 지식탐구와 민족의 정체성에 관해 많은 관심을 가졌던 학창시절에 친구의 권유로 대종교 예배에 몇 차례 참석한 적이 있다. 이 종교가 나의 혈관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숙연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망명 초기 북간도 동불사에 정착을 하고 약방 운영 등으로 기력을 되찾은 병욱(炳郁), 종현(宗玹) 외할아버님들은 망명의 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하셨다. 독립운동가들의 임시 거처를 제공하고 주요연락기지 역할도 해냈다. 3 .1만세 운동에도 참여했고,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뒷마무리에 협조하였다고 전해진다.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외증조모 진양 출신 박씨의 이야기다. 외증조부 병욱(炳郁)은 성격이 강직하고 준엄하기까지 했던 분인데, 이에 반해 자유분방하고 활달했던 외증조모 박씨는 아무도 못 말리는 분이었다. 당신이 생각해서 옳다고 판단하면 끝까지 승부를 보는 여걸이었다.

호랑이 같은 외증조부도 박씨 할머니와는 타협적으로 친화를 유지하고, 절대 우격다짐을 피했다 한다. 따라서 북간도의 생활이 무료하고 고향 생각이 나면 당신만 유일하게 마음대로 고향나들이를 했다고 한다. 친정이 진양(사실인즉 통영과의 경계)인지라 새로 난 기찻길도 멀지 않았고, 가고 오다 며칠씩 친정에 머물곤 했단다. 
 
태안 박(朴)씨는 통영골에서 부자였고 글한 분이 많았던 명문가이다. 그 집안 출신의 근대 작가로서 박경리(朴景利) 선생을 들 수 있다. 박경리 선생의 고모가 나의 외증조모로 알고 있다.

외가 할아버지 부자(父子)분께서는 고향에서 온 수차례의 특사와 서울 김 대감댁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귀환을 거부했고, 두 분은 2년 간격으로 나란히 저세상으로 떠난 후 백골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유택(幽宅)에 묻히는 한 많은 일생을 사셨다. 

외숙부 서운 호일(棲雲 鎬一)

광양군지(光陽郡誌)의 「광양교육의 현황」에 나오는 서운(棲雲) 선생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엮어 보고자 한다.

신세기의 여명 1901년 11월 14일 진상면 비촌(飛村)에서 창원 황(黃)씨 집성촌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일찍 서당에서 글을 깨치고 장손으로서의 법도를 수습하는 단계에서 한일합병으로 인한 일제의 강압이 점차 심해지자 부모 따라 북간도로 이주하게 되었다. 

조부님이 망명을 결심했을 때 비촌 황(黃)씨 원로들은 많은 반대를 했다. 시제(時祭) 등 가족 주요 행사에는 반드시 참여한다는 조건으로 떠나게 되어 서운(棲雲)이 장성할 때까지 부친 종현(宗玹)이 자주 고향에 내려오셨다.

서운(棲雲)은 조부, 친부를 통해 계속 한학(漢學)을 공부했고, 19세 때 귀향하여 서울의 중동학원에 입학, 신학(新學)을 공부하였다. 이때 서울 유학에 동행한 분이 나의 백부 원예(園藝) 김현주(金鉉周)였다. 이 두 분은 동향인으로, 학우로 그리고 친사간(親査間)으로 영원한 친고(親故)요 동업자로 일생을 같이 했다.
 
서운(棲雲)은 신학(新學)에는 별 뜻을 두지 않고 2년을 마치자 바로 사업에 투신하였다. 처음에는 미두(현물 없이 쌀을 팔고 사는 일로서 일종의 투기)로 재미를 보아 자본이 형성되자 미두의 본고장인 인천에서 신식 양복공장을 개설했다. 그러나 양복에 대한 경험도 없고 과잉투자를 한 나머지 결국 사업실패로 끝나고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 외숙부 서운 호일(棲雲 鎬一) / 1960년 경

인천 앞바다가 눈앞에 묘하게 출렁이는 순간, 어느 전북(全北) 출신의 의인(義人)을 만나 ‘인생은 살 가치가 있고, 얼마든지 환생이 가능하다’는 가르침에 새로 눈을 뜨게 된다. 그분은 주역(周易)과 정감록(鄭鑑錄)을 신봉하는 분으로 서운(棲雲)에게 많은 정신적인 영향을 주었고, 서운(棲雲)의 평생을 좌우했던 ‘도참설’과 ‘명당’ 구하기에 심취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서운(棲雲)은 이 무렵 한 살 위인 광양 출신 정씨와 결혼했고, 가장으로서의 책임 그리고 망명으로 인한 손실된 재산을 하루 속히 복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미두에 손대고, 양복공장을 시작하게 된 동기였으리라 본다. 나이도 약관이고 지금까지 농경사회의 굴레를 겨우 벗어나려는 상태에서 너무 조급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때 서운(棲雲)은 평생 지켜야 되겠다고 약속한 두 가지를 실천에 옮겼다. 첫째는, 술을 끊은 것이다. 이것은 북간도에서부터 시작 되었다. 어느 날 추수를 해서 소달구지에 잔뜩 싣고 머슴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데 전날 촉촉이 내린 비로 만주의 농로(農路)가 뻘길로 변했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간신히 오다가 바퀴가 허방에 빠지고 달구지가 반쯤 옆으로 기울어지자 도리 없이 가을걷이를 전부 내리고 달구지를 힘들게 뺀 다음 다시 적재를 해서 집으로 돌아오니 밤중이 되었다 한다. 

이러한 노동과, 장래가 없어 보이는 이 생활에 화가 치밀어 그만 시장 바닥에서 술을 퍼 마시고 만취가 되어 집에 떠메어져 들어왔단다. 일은 다음날 터지고 말았다. 아버지가 아들의 방종에 화가 나시고 만 것이다. 

벽장에서 광목 두 필을 끌어내 대들보에 거시더니 ‘할아버지 앞에 이런 불효가 없다. 너는 씻을 수 없는 잘못을 했으니, 잘못 가르친 아비와 함께 대들보에 목을 매고 죽자.’ 온 집안이 울음바다가 되고 야단이 났다. 다시는 술을 들지 않겠다는 약속을 단단히 하고 곧 해방이 되었다. 그 후 일체 술을 멀리 하셨고, 은퇴 후 70~80이 되시면서 기력 보충을 위해 약주를 반주로 조금씩 하신 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둘째는, 양복을 평생 걸치지 않았다.

농토를 둘러보실 때도 핫바지 차림이었고, 솥공장을 운영하실 때도 핫바지 차림이요, 한양 등 대도시에 나들이 하실 때에도 언제나 한복에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아마도 양복과는 인연이 닿지 않는다는 생각이 깊이 배었을 것이다. 여행 중 일경의 잦은 검문을 당하는 불편을 겪으면서까지 말이다.

다시 심신을 추스린 서운(棲雲)은 고향으로 내려와 광양읍 부근의 처가댁 주물 공장에서 일을 돕는다. 무쇠로 솥, 화로, 보습, 삽, 괭이 등을 만드는 제조업체이다. 빙부인 정덕룡(鄭德龍) 옹(翁)은 광양군내에서 5대 재산가에 들었으며 주물공장과 정미소로 거금을 모았다. 장남 창욱은 군내(郡內)에서 첫 번째 일본유학생으로 명치대(明治大)를 졸업하고, 해방 후에 경찰 간부 등 관직을 지냈다.

서운(棲雲)은 주물제조에 관한 기술을 익힌 다음, 하동시장에 판매대리점을 개설해서 운영하고 있었다. 이 무렵 나의 부친은 서운(棲雲)의 바로 밑에 여동생인 우리 어머님과 인연을 맺게 된다.
 
1930년대 초 서운(棲雲)은 주물에 관한 한 자신을 얻고 공장을 인수 직영해 보기로 결심하고, 고흥 부자 서화일(서민호:徐珉豪 선생의 부친) 씨 소유의 벌교에 있는 광명주물공장을 인수했다. 전라남도에서는 두 번째로 큰 주물공장이었다(제일 큰 것은 송정리에 있었음). 

좀 무리한 인수였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아 투자금을 융자 또는 차용에 의지했다. 하동 쌍계의 대고모부가 3,600원을 보증서고, 가까운 친구인 나의 백부 현주(鉉周)에게서 현금으로 3,000원을 꾸고 그리고 나머지는 광양의 현금 부호 우(宇) 씨에게서 차입해 인수자금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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