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3주간의 기초 훈련이 끝나자 이동명령이 떨어졌다. 약 20여 대의 트럭에 분승하여 긴 호위대(convoy)를 형성해서 점촌, 문경새재를 넘어 충주 외곽의 빈집들에 분산 주둔했다. 충주 시내는 아직 수복이 덜 되어 민간인이 거의 없었다. 우리들을 목격한 시민들은 일본 군인들이 참전했다고 소문을 퍼트렸다. 왜냐하면 전투요원 치고는 좀 나이 들어 보였고 말쑥한데다, 군복, 철모, 배낭 그리고 소총 등 무기까지 전부 신품이기 때문에 그러한 오해가 생겼고 순식간에 주변에 유언비어가 퍼졌다.
2, 3일 정도 주둔하다가 지금의 충주호를 거쳐 단양읍으로 들어가 단양농업 학교 교사를 부대 막사로 이용했다. 단양경찰서가 갓 복귀하여 문을 열었고, 서와 협조하면서 태백산 일대의 빨치산 및 패잔병의 준동현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가끔씩 귀순자가 있어 서에 가서 심문하기도 했다.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내다 어느 날 난데없이 비행기 공습을 받게 되었다. 오전 식사를 끝내고 있는데, 갑자기 따따따-하면서 F-51 무스탕 전투기가 기총소사를 하며 올라채고 있었고, 또 한 대가 내리꽂으며 발사하고 있었다.
우군기에 기습을 당한 것이다. 모두 산으로 내빼는데 부대장 렘지가 붉은 항공판 두 장을 재빨리 운동장으로 끌고 나간다. 아찔한 순간이다. 그날의 암호에 따라 표시판을 펼쳤더니 전투기가 사라졌다. 부대장이 매우 용감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대장은 자책조로 자기 잘못이라고 고백한다. 전선 가까운데 주둔하는 부대는 반드시 그날의 신호에 따라 항공표지판을 깔아 우군기에 알리게 되어 있었다.
다행히 부상자 하나 없었고, 식당으로 사용하던 창고가 예광탄으로 불이 붙었으나 곧 진화되었다. 여하튼 지휘관이란 위급한 상황에서 부하와 조직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릴 수 있는 각오가 되어야 한다는 좋은 본보기였다. 다음날 이동명령이 내렸다. 영월로 가는 도중에 영춘이라는 면 소재지가 있다. 그곳 국민학교에 주둔지를 정하고 인근 소백산의 패잔병 소탕 임무가 주어졌다.
어느 날 정찰병을 소백산 쪽으로 내보냈다. 형제봉 근처에서 적의 출몰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다음날 새벽 전원 출동명령이 내려졌다.
약 250명이 일렬종대로 행군하면 앞의 첨병(Point)으로부터 후미까지 장장 약 2km로 뻗는다. 나는 젊고 활동적이라 해서 첨병 바로 뒤에 위치한 전방 지휘관 클라크 대위와 함께 행군했다. 첨병으로부터 전방 상황을 수시로 보고 받고 중앙에 위치한 본부에 전달하는 일이 주 임무다. 전방이 불확실하면 수시로 엎드려 살피고 하느라 오전 내내 행군해도 형제봉 언저리에서 맴돌았다.
그런데 갑자기 BAR(브라우닝 자동소총) 소리가 전방에서 요란하다. 적병의 감시원으로 보이는 자를 능선에서 발견하고 발사했다는 것이다. 흩어져서 C-레이션으로 요기를 하고, 소백산 정상 쪽으로 계속 행군했다. 또 한 번의 BAR소리가 요란하다. 이번에도 이차감시병으로 보이는 자를 발견했는데 도주하는 쪽으로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분명히 적의 동정(動靜)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긴장을 늦추지 아니했다.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기운다. 소백산 약 8부 능선에 올라 서북쪽으로 갈라진 긴 능선에 군장을 풀고 하룻밤 숙영(宿營)하기로 했다. 자기방어와 더불어 추위를 이겨내는 방법은 개인호를 잘 파는 것이다. 장교, 사병(將校, 士兵) 할 것 없이 자기 호를 자기가 판다. 일반부대에서는 장교의 호는 연락병이 도와주는 모양인데, 특수부대에서는 각자가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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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 당시 눈 쌓인 전선에서 호를 파고 있는 미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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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맨땅을 50~70cm 깊이로 파내려 간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적의 기습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완벽한 호가 아니면 노출이 돼 맞아 죽기 십상이다.얼마나 열심히 찍고 파고 했는지, 약 두 시간 만에 호가 완성됐다. 가랑잎을 푸짐하게 깔고 누워보니 이런 안락한 공간이 없다. 역시 덩치가 크고 힘이 좋은 미군들은 호도 잘 팠다, 빠르게 그리고 완벽하게.
사방 경계병을 부대에서 약 1~2km 떨어진 곳에 배치하고 매 시간마다 교대하게 했다. 초저녁에는 고단하기까지 하니 약간 눈을 부쳤으나, 밤중에는 너무 추워서 달달 떠느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배낭까지 모조리 펴고 덮어도 별 소용이 없다.
그러다가 새벽녘에 깜빡 잠이 들었다. 잠시 후 일어나 보니 사방이 흰 눈으로 살짝 덮였다. 전장이라는 것이 실감났다. 그중 일부는 모닥불을 지피고 쬐고 있었다. 거지가 모닥불에 살찐다고 했던가. 얼마나 훈훈하고 나른한지 고단한 중에도 참말로 기분 좋았다.
전날 저녁에는, 불을 피우면 우리 위치가 노출된다고 해서 일체 불을 피우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날은 이동, 철수할 판이라 불을 마음대로 지피고 C-레이션도 불에 데워 먹을 수 있어 너무 좋았다.
모두 수습이 끝난 후 출발명령이 떨어졌다. 약 10분 정도 행군했을 때, SSB 무선에서 ‘적 발견’ 이라는 급보를 받았다. 중앙 본부에 연락하고 클라크 대위와 나는 첨병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조그마한 언덕인데, 바위 틈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잘 위장된 적의 아지트가 보였다. 싸릿대로 만든 용수 같은 거대한 조립품 몇 개도 개울 옆에 서 있다(나중에 확인한 것이지만 그것은 장기전(長期戰)을 위해 식량이 떨어지면 식량 대용으로 쓰려고 도토리와 산열매를 수집해 가득 채워 두고 물로 계속 희석하고 있는 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