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임관에 관한 심사 결과가 나왔다. 불합격이었다.
첫째 나의 호적 나이가 장교임관 요건에 미달됐다. 또한 회화 능력은 좋았으나 필기시험 점수도 미달이었다. 쟁쟁한 일류대학 영문과 출신의 형님들과는 경쟁이 되지 못했다. 군속 문관신분으로 장교단에 계속 근무할 수는 있었으나, 뭔지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침 미 10군단(軍團) 예하 특수전부대(特殊戰部隊) S.A.G(Special Activity Group), 일명 레인저(Ranger)부대라고 하는데, 이 부대에서 젊고 활동적인 통역요원파견을 연락장교단에 의뢰했다. 비정규전을 주 임무로 하는 소부대로서 주(主) 저항선 바로 후방에서 주요 사령부를 측방경계 한다. 적의 패잔병을 소탕하고, 주요 보급로를 확보하면서 피난민을 정돈하는 등의 단편적인 임무였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수색 . 정찰 임무도 수행한다. 지휘체계는 모두 미군의 베테랑 직업군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육군본부로 쫓아가 인터뷰를 받고 합격했다. 육사 5기생으로 당시 육군 소령이던 배동걸(裵東傑)가 인솔책임자였다. 어떻게 되었는지 미군 소령의 계급장에 무테 안경을 쓴 스마트한 분이었다. 미군 특수부대에서 특파된 동포 미군장교로 생각했다. 그런데 영어가 시원찮았다. 주일미군사령부(駐日美軍司令部)에서 교육받은 특수부대의 한국 육군 책임자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전투부대(戰鬪部隊)에 참가함으로써 학도병으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S.A.G에는 3개 단위 부대가 있었다.
제 1제대는 미군과 일본에 가서 훈련받고 돌아온 사병(UN군이라 했음, KATUSA의 전신)으로 구성되었다. 제 2제대는 배(裵)소령이 지휘하는 100% 한국군으로 구성됐고, 미국 고문관이 있었다. 제 3제대는 미군 지휘관 아래 주요 보직은 모두 미군이고, 병력으로는 서울시경찰국에 근무하는 젊은 경찰관이 배치되었다. Police Company라고도 불렀는데, 1 . 4 후퇴때 대구시에 내려와 재집결한 병력이었다. 따라서 약간 군기가 느슨하고 인간미가 있는 부대였다.
합격한 약 10여 명 중, 김용권(당시 서울대 영문과 2년, 후에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 재직), 장 선생(서울상대 재학 정도로 알고 있었으나 연락이 두절), 그리고 고교재학생인 나 3명은 Police Company에 배속됐다. 학도병(學徒兵)이 된 것이다.
다음날 군용차를 타고 오전 내내 달려 도착한 곳이 안동시였다. 시 입구 낙동강 다리 근처에 여러 대의 인민군 탱크가 파괴되어 있었다. 지난 여름의 최후 방어선 낙동강 전투가 치열했음을 보여주었다.
오후 두시쯤 안동 지방철도국 관사에 도착, 여장을 풀고 생애 처음으로 미군식사를 했다. 간식이었으므로 ‘토마토 스프’에 크래커가 나왔는데, 일행 중 대부분은 비위가 상한다고 먹지 못했다.
10명 중 우리 3명만 안동에 남고 나머지 인원은 거리가 좀 떨어져 있는 타 소속 부대로 배치되었다.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전투 훈련에 돌입했다. 제식훈련은 일체 없고, 총기 다루는 훈련과 사격연습이었다. 특히 분대 단위 전투제대와 BAR 및 경기관총 사용법에 중점을 두었다. 수류탄 투척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우리의 역할은 지휘관(Commander)인 렘지 대위(Captain Remgey), 부지휘관(Deputy)인 클라크 대위(Captain Clark), 작전관(Operations)인 고드프리 중위(Lt. Godfrey) 등을 보좌하고, 미군 하사관의 훈련 시범을 번역해 주는 일이었다. 당시 우리들의 영어 실력으로 그렇게 낯선 군사용어를 어떻게 납득이 가게 설명했는지 지금도 불가사의하다.
다만 그때 Police 부대(部隊)에 행운이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Sgt. Kenneth Kim 이라는 선임하사 격인 최고 상사가 하와이 동포 출신으로 한국어를 제법 구사했고,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어 군사문제에 박식했다(그는 S.A.G 해산 후에 미 4사단에 재배치됐다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음).
또 하나의 행운은 Police 한국 측 지휘 책임자가 천세기 경감(千世基 警監)으로 일제 때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나오신 수재로서, 영어 필답(英語 筆答)이 매우 우수했던 것이다. 우리의 짧은 영어실력에다 위 두 분의 지원이 가산되어 S.A.G 내에서는 가장 소통이 잘 되는 부대였다고 생각한다.
천세기 선생은 그 후 양평에서 출마하여 내리 3선(三選)을 한 중견 정치인으로 활약하시다 정치 현실에 많은 실망을 하시고 지병까지 재발해 자결하시고 말았다. 그는 부하들을 아끼고 모든 업무처리가 공평무사했다. PX물품이 배급되면 사적으로 챙기는 법이 없고, 공정하게 분배하는 모습은 퍽 존경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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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세기 의원의 자결 보도기사 [경향신문 1965. 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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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주간의 기초 훈련이 끝나자 이동명령이 떨어졌다. 약 20여 대의 트럭에 분승하여 긴 호위대(convoy)를 형성해서 점촌, 문경새재를 넘어 충주 외곽의 빈집들에 분산 주둔했다. 충주 시내는 아직 수복이 덜 되어 민간인이 거의 없었다. 우리들을 목격한 시민들은 일본 군인들이 참전했다고 소문을 퍼트렸다. 왜냐하면 전투요원 치고는 좀 나이 들어 보였고 말쑥한데다, 군복, 철모, 배낭 그리고 소총 등 무기까지 전부 신품이기 때문에 그러한 오해가 생겼고 순식간에 주변에 유언비어가 퍼졌다.
2, 3일 정도 주둔하다가 지금의 충주호를 거쳐 단양읍으로 들어가 단양농업 학교 교사를 부대 막사로 이용했다. 단양경찰서가 갓 복귀하여 문을 열었고, 서와 협조하면서 태백산 일대의 빨치산 및 패잔병의 준동현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가끔씩 귀순자가 있어 서에 가서 심문하기도 했다.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내다 어느 날 난데없이 비행기 공습을 받게 되었다. 오전 식사를 끝내고 있는데, 갑자기 따따따-하면서 F-51 무스탕 전투기가 기총소사를 하며 올라채고 있었고, 또 한 대가 내리꽂으며 발사하고 있었다.
우군기에 기습을 당한 것이다. 모두 산으로 내빼는데 부대장 렘지가 붉은 항공판 두 장을 재빨리 운동장으로 끌고 나간다. 아찔한 순간이다. 그날의 암호에 따라 표시판을 펼쳤더니 전투기가 사라졌다. 부대장이 매우 용감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대장은 자책조로 자기 잘못이라고 고백한다. 전선 가까운데 주둔하는 부대는 반드시 그날의 신호에 따라 항공표지판을 깔아 우군기에 알리게 되어 있었다.
다행히 부상자 하나 없었고, 식당으로 사용하던 창고가 예광탄으로 불이 붙었으나 곧 진화되었다. 여하튼 지휘관이란 위급한 상황에서 부하와 조직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릴 수 있는 각오가 되어야 한다는 좋은 본보기였다.
다음날 이동명령이 내렸다. 영월로 가는 도중에 영춘이라는 면 소재지가 있다. 그곳 국민학교에 주둔지를 정하고 인근 소백산의 패잔병 소탕 임무가 주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