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PEC으로의 발전 (121회)
  제15장 KNE 시절

KNE 요원의 교육훈련

입사한 기술 사원은 무조건 원자력연구소 연수원에서 시행하는 원자력 기초과정에서 교육받도록 했다. 그리고 첫 번째 해외 훈련은 Bechtel이 수락한 1차 O.J.P. 요원 12명을 파견했는데 가족까지 동반할 수 있는 특전을 주었기 때문에 사기가 매우 높았다. 그리고 영광 1, 2호기까지 계약되면서 Peak time 약 60여 명이 ANAHEIM Bechtel에 주재하게 된다.

주요 산업계의 출자 그리고 한국전력의 본격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자금이 다소 여유가 생긴 KNE는 우리 비용으로 집단교육을 해외에서 할 수 있게 준비하게 되었다. 당시 Sensitive technology의 망령을 아직도 떨쳐 버리지 못한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여러 나라는 우리에게 선뜻 교육의 기회를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다행히 Belgium의 Belgatom은 「원자력발전」 관계라면 강대국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듯 재빨리 「오퍼」를 줌으로써 훈련 계약이 성사되었다. 이 연수 계약에 의해 KNE에서 1차로 42명을 선발하고, 한국전력 요원 3명이 합류하여 계 45명이 1979년 6월에 유럽 장도에 오르게 되었다.

이들 연수생들은 설계 전반 과정을 이수하게 하고 원자력발전 A/E 전반에 대한 기초기술을 습득하게 했다. Bechtel사와 Belgatom사에 인원이 계속 추가로 파견되면서, 그들이 입수한 귀중한 자료들이 속속 본사에 전달되어 자료실에 보관됨으로써 앞으로의 업무에 많은 도움이 되었고, 장차 KOPEC의 기술자산으로 훌륭한 역할을 했다.

해외 파견이 늘면서 이들의 여권수속 그리고 까다로운 신원조회 문제가 있었다. 어느 날 나와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하재윤(河在潤) 동지가 울산에서 올라와 아이들 교육관계도 있고 해서 상경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 왔다. 대한석유공사 울산공장 구매과장을 하는데 적성에도 안 맞고 고향 근처인지라 인정을 배제하기도 힘들고 이제 떠나기로 했다고 신고했다.

마침 행정 쪽에서도 영어에 능한 사람이 필요했던지라 경영진과 협의해 행정차장으로 발탁했다. 직원 해외훈련 파견에 필요한 모든 수속을 책임지게 했다. 그런데 파견예정 직원 가운데 상당한 수가 신원조회 부적격 판정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파견송출이 불가능해 진다. 대부분 대학시절 유신헌법 반대, 긴급조치 철회 등 데모에 앞장 선 경력이 있어 「구류조치」, 「조사서작성」 등의 특기(特記)를 가지고 있고, 일부는 주모(主謀) 급도 있었다.

이때 일본 작가(紫田 練三郞)의 「능글맞은 녀석」이라는 소설이 언뜻 생각났다. 재벌급의 한 회장이 필기시험에 합격한 입사희망자를 하나 남김없이 직접 면접을 하는데 반드시 질문 하나를 빼놓지 않았다. 「귀군은 학생시절 데모를 했는가?」였다. 「예, 좀 했습니다.」하면 무조건 합격시켰다고 한다.

옆에 있던 인사과장이 「회장님, 이렇게 반골만 입사시키면 노·사(勞社) 문제가 심각해 집니다.」라고 우려의 말문을 열자 회장 왈(曰), 「이 사람아, 학생시절 데모 한번 못해 본 놈 어디다 써먹나!」 하며 일언지하에 꺾어 버리고 「우리는 샌님보다는 정열이 더 필요해!」 했단다.

하(河) 차장과 함께 숙의해서 방법을 최대한 강구하도록 했다. 하 차장은 통역장교에, Tank부대 중대장을 지냈고, 국가재건최고희의에서 근무했던 경력으로 여기저기 발이 넓었다. 중앙정보부 친구들과도 협의해서 특기자(特記者)들을 대신해 자술서를 쓰고, 공직자 2명 이상의 보증을 세우고 해서 하나하나 해결해 나갔다. 보증인 중에는 산골 초등학교 은사인 교장선생님도 있었다. 이렇게 해결하다보니 특기자를 포함하여 하나도 낙오자가 없었다.
 
▲ KNE(KOPEC) 1기생 / 그리고 KNE창설간부와의 합동촬영 (1978.)

해외훈련도 계속했지만 국내교육도 강화해 나갔다. 그 중의 하나의 예는 미국 대사관과 협조로 미국 내의 은퇴 원로기술자를 KSC를 통해 모셔와 전문분야별로 반(班)을 구성했다. 특히 기억나는 것은 Q.A. 분야인데 당시 기술력 향상의 첫 관문이 품질관리였다. 개념자체가 생소했던 시절 KNE는 이를 채택했다.

첫 인사(人士)는 미국 Oregon Power의 부회장을 지냈던 미 육군 공병감 출신 퇴역 중장이 자원해서 부인과 함께 왔고, GE에서 40년 종사하다 은퇴한 QA 할아버지 내외가 KNE 국내 교육에 보탬을 주었다. 이렇게 KNE는 초창기 훈련과 참여, 참여와 훈련이라는 면에서 전방위적(全方位的)으로 헤쳐 나갔다.

KOPEC으로의 발전

KNE 훈련을 통해 실력을 기르고, 용역비가 해외에서 「달러」로 도착하면서 자신이 붙어갔다. 1979년 말 영광 원전 1, 2호기가 계약되었다. 고리 3, 4호기와 같은 방식의 계약이었다. 다만 국산화 비율을 대폭 확대하는 방향으로 계약이 조정되었다. 특히 A/E에 있어서는 참여인원도 대폭 늘어났으며 참여방식도 Bechtel이 물론 주도를 하되 요소요소에 KNE 직원이 들어가 프로젝트 중요간부의 일부를 부(副)라는 꼬리표를 달고 들어가게 했다.

신기조(辛基祚) 수석의 주장과 신재인(申載仁) 박사의 Bechtel 현지 교섭의 성공의 결과였다. 즉 PE(Project Engineer) 그리고 EGS(Engineer Group Supervisor)까지 Counter part로 임명할 수 있게 교섭이 타결된 것이다. 처음에는 Bechtel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으나 음으로 양으로 강한 압박 끝에 성공하였고, 이것은 KNE로서는 아주 소중한 경험과 Know How가 되었다.

이 방식은 공산당이 어느 정권을 접수할 때 흔히 쓰는 방식으로서 우선 경험이 없기 때문에 기존의 잔존세력을 앞에 내세우고, 바로 부(副)자를 달고 뒤에서 실제적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설계기술의 능력이 붙고, 성과가 좋아지자 한국전력에서는 1981년 독자적인 출자를 결정하고, 연구소의 KNE 지분을 제외한 모든 주식을 매입한 후 증자(增資)를 통하여 한국전력의 자회사로 만들어 회사의 이름도 한국전력기술(주), 즉 KOPEC(Korea Power Engineering Co.)으로 바꾸었다(1982.7.6.).

사옥도 태릉의 연구소에서 여의도 한전 소유 건물로 이전하였다. 연구소가 A/E의 필요성을 간파한지 10여년 만에 온전한 A/E 회사로 발돋움하고 여의도로 이전할 무렵에는 인원도 약 800명의 국내 제일의 대(大) 엔지니어링 회사가 되었다.

KOPEC의 A/E 국산화의 또 하나의 전기는 역시 영광 3, 4호기의 발주 때에 왔다. KOPEC는 영광 원전 3호기가 건설되어 상업 운전에 들어가는 1995년 시점에서 국산화를 95% 달성한다는 목표를 이미 1984년 초에 세웠다. 한전과도 협의를 끝내고 그 방향으로 회사의 역량을 집중했다.

1995년 3월 영광 원전 3호기가 출력을 개시했을 때 KOPEC이 1984년 초에 세웠던 기술자립 목표 95%를 달성했다. 드디어 원자력발전 기술 용역분야에서 세계강국의 대열에 들어선 것이다.

신기조 선생의 회고대로
「...오늘날 지구촌이 국경없는 하나의 시장이 되고, 첨단기술의 보유여하로 국력 순위가 결정되는 냉엄한 무한경쟁시대 속에서 남의 나라의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딪히고 떼를 쓰며 그들의 기술을 하나하나 우리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수치스러움도 참고, 어깨너머로 우리는 차근차근 고기 잡는 법을 배움으로써 오늘날 한국형 원자력발전소를 독자적으로 건설하면서 세계 6위의 원자력발전 대국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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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전(原電) 전(全)과정의 국산화_1 (12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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