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결혼이 성사되지 않을 경우 아쉬운 사람을 놓칠 수도..
그 처녀의 첫인상은, 키도 커 보이고 호리호리한 몸매가 교회에서 처음 본 부인과 너무나 닮은꼴이었다. 내가 그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쪽의 5명이 우리를 검증하는 듯 한 압박감도 느껴졌다.
그 처녀의 아버지는 교회 장로이자 미국 선교부 소속으로 선교부에서 일어나는 각종 건축 일을 전담하시는 분이었다. 옆에 앉아있던 청년 역시 그 처녀와 많이 닮았는데, 바로 위 오빠였고 연세대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이었다. 처녀의 어머니는 교회에서 권사 직분을 맡아 예수교 장로회 남노회 여전도회에서 활동 중이시라고 했다. 중간에서 소개하고 계신 분은 우리와 같은 교인이시고 처녀의 고모라고 했다. 처녀는 숙명여자대학교 영문과를 그해(1968년) 2월에 졸업했으니, 그야말로 세상 물정 모르는 사회 초년생이었다.
순간적으로, 어떤 이유로든 이번 결혼이 성사되지 않을 경우 아쉬운 사람을 놓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렇게 자리가 마련된 이상 내 처지가 어떻든 그쪽의 질문 공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로 마음을 정리했다. 그분들이 던진 질문의 요지는 내 교회생활에 대한 궁금증과 재직 중인 내 직장의 전망, 앞으로의 계획 등이었다.
그중에서도 내 직장에 대한 불만을 어떻게 잘 포장해서 얘기할 것인지가 가장 내 마음을 자극하는 고민이었다. 그러나 주저 없이 대답했다. 앞으로 외국에 나가서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그 무렵, 캐나다와 호주로의 진출 건과 진척상황을 설명했다. 당장은 인천 직장에서 D 공업전문학교로 옮기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옆을 슬쩍 보니, 어머니는 커피잔에 설탕을 넣은 숟가락으로 크림을 떠 넣고 커피 맛을 보신 후 다시 그 숟가락으로 커피를 떠서 들고 계셨다. 시골티를 한껏 내시는 어머니를 그 자리에서 말릴 수 없어 안타까웠던 마음이 지금도 생각난다. 다방에서의 대화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거기서 가능한 한 빨리 용무를 끝내고 용산 시외버스 정류장 쪽으로 가서 인천으로 곧장 내려가야 하는데 웬일일까? 용산 방면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좀처럼 나질 않는 것이었다.
인천 방향을 포기하고 종로 ‘한일관’으로 발길
그날 오후에는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우리 부모님과 그쪽 어른들은 집으로 돌아가셨고, 이제 우리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저녁 식사시간이 다가오는데,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갈 것인지 적당한 식사장소로 옮길 것인지 도대체 머리가 복잡했다. 우리는 일단 명동 입구 쪽으로 걸었다. 내가 그 처녀에게 “그 우산 접고 내 우산 속으로 들어오시죠.” 하자 얼른 자기 우산을 접고 내 우산 속으로 쏙 들어오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마치 오래전부터 교제해온 사람 같기도 하고 한 가족처럼 편안한 느낌도 들었다. 이미 그때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 첫 마음이 일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녀가 나와 일생을 함께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도 생겼다. 그녀가 내 우산 속에 들어오면서 나는 인천 방향을 포기하고 종로 ‘한일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처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숨김없이 해주었다. 대학 4학년 2학기 때, 서울 시내 S 여자중학교 교생실습 하며 그 학교장으로부터 칭찬받은 일, 교회 청년회 활동, 교회 성가대 반주자로서 해야 할 역할, 자기 오빠는 연세대 신학대학원 졸업 후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 갈 계획이라는 것, S 여자중학교 영어교사로 취직할 예정이라는 것 등을 서슴없이 얘기하는 모습이 참으로 순수했다.
빗속을 걸어 저녁을 먹기 위해 찾아간 곳은 종로에서 유명하다는 한정식집 ‘한일관’이었다. 마주앉은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 보였지만 사진에서 느낀 순수한 모습은 여전했다. 나는 그녀를 ‘김 선생’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김 선생과의 대화를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나는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말을 꺼냈다.
“김 선생님, 나는 이른바 일류대학 출신도 아니고, 인기 있는 학과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월급도 일류기업 사원들보다 훨씬 적고…, 이렇게 모든 조건이 부족한데 과연 내가 김 선생님 같은 분과 상대가 될지 많이 불안합니다.”
젊은 아가씨치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대답
사실 그때 내 마음은 그 무렵의 내 형편이 결혼하기에는 역부족이라 적당히 내 사정을 알리고 결혼이 성사되지 않을 경우, 김 선생과 그 부모님의 체면을 살려주고 싶어서였다. 한편, 내 어려운 형편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흔치 않게 귀한 사람으로 여기고 배우자감으로 다시 생각해 볼만한 여자로 생각이 되었다. 차라리 퇴짜를 맞더라도 일찍 맞으면 애초의 계획대로 어떻게든 외국에 혼자 나갈 생각이었다.
김 선생은 내 말에 거침없이 “일류대학 출신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지요. 월급이 적으면 덜 쓰고 저축해서 알뜰히 살림하는 게 중요하지요.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요. 데이트 비용이 걱정이라면 돈이 안 드는 곳에서 만날 수도 있고,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고 생각해요.”라고 대답하는 게 아닌가? 속이 있는 여자인지, 순수해서인지, 아니면 딴 세상에서 온 여자인지…. 젊은 아가씨치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대답을 했다.
시간이 자꾸 흘렀다. 이제는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어서 인천행 시외버스를 타기 위해 용산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헤어질 때 김 선생은 내게 서슴없이 “저를 위해기도 많이 해주시라.”라고 했다. 그날 그렇게 우리는 일단 헤어졌다. 자기를 위해서 무슨 기도를 해달라는 건가? 그의 신앙심은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 그저 일요일 예배 정도의 신앙생활 하는 나와는 확연히 달랐다. 4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탓일까? 5남매 중 큰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의지로 신학교에 보내서 목사 안수를 받게 하셨다는 김 선생 부모님이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성경학교 정도 다니며 적당히 목사 안수 받아 목회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오죽하면 달(月) 성경학교 출신 목회자라는 말도 있었겠는가? 목사 안수받기 위해서 굳이 대학교 졸업 후 신학대학원까지 졸업하는 등의 코스를 밟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었다. 그런데도 하물며 큰아들을 신학 공부시켜 하나님께 바칠 정도의 집안이라면 그 가족의 신앙심이 어느 정도인지 거의 짐작이 되는 일이었다.
또다시 아침이 밝았다. 회사에서의 일정은 변화가 없었다. 출근하자마자 출근부에 도장 찍고, 과장님으로부터 작업 지시받고, 또 그 결과를 보고하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 쏜살같이 식당에 달려가서 점심 먹고, 다시 시험실에 돌아와서 업무일지에 시험성적 기록하고, 기술상무님께 전반적인 업무지시를 받기도 하고, 시험실 내부 청소하고 퇴근하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기분이 좀 나면 직원들과 주안 사거리쯤 나가서 소주 한 잔 마시며 여러 가지 불만을 털어내다가 늦게 하숙집으로 들어가는 게 전부였다. 이부자리에 들어가기 전, 얼굴과 발만 씻으면 하루일과는 완전히 끝났다. 김 선생과는 두어 번 더 만났는데, 특별한 대화는 없이 만날 때마다 교회생활과 신앙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