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1963)가 되었다. 장교후보생으로서의 교내 병영훈련, 아르바이트라는 학생직업, 학교수업, 자취생활 등 내 일과는 톱니바퀴처럼 빡빡하게 돌아갔다. 그래도 어떻게든 졸업만 하면 바로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과 큰 기대를 품고 있었기에 재미있게 보낼 수 있었다. 육체적으로는 좀 지치는 듯했지만, 20대의 젊음과 희망으로 그 정도는 이겨낼 수가 있었다. 그토록 빠듯하게 생활하다 보니 학과 내 몇 명 안 되는 친구들과도 도저히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전라도에서 유학 왔다고 하면 아무 이유 없이 멀리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것은 서울 사람들의 은근한 편견이었다. 그러나 그중에서 전라도 촌놈을 떠나 나하고 마음이 통하는 친구(캐나다 거주)가 한 명 있었다.
그 친구는 서울 토박이였는데, 맛있는 반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내 자취방에 가끔 들러서 묵은 김치, 젓갈, 된장국, 그리고 잡곡밥을 자기 집에서 먹는 것보다 더 맛있다며 먹곤 했다. 무엇이 그렇게 맛있어서 나 혼자 먹어도 부족한 밥을 홀랑 다 먹어버리는지 속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그 친구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냥 색다른 맛으로 느껴진 걸까? 어쨌든 그 친구 김용규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 사람이다.
그 친구와의 추억 중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휴강 소식이 전해졌다. 여기저기서 즐거운 비명과 함성이 울리고 일부 학생들은 당구장과 극장, 음감상실로, 일부는 집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나도 집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그 친구가 나를 부르더니 “우리 집에 가서 음악 감상이나 하자.”고 했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이른바 사대문 안의 기와집에 가서 클래식 음악 감상을 하자고? 마땅히 갈 데가 없어서 망설이던 참이라 선뜻 동의했고 그 친구 집에 함께 갔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내린 곳은 동대문 가까이에 있는 종로구 효제동, 기와집 동네였다.
그 친구가 나를 부를 때는 항상 “야, 촌놈!”이었고, 나는 “뭐? 그래, 촌놈 여기 있다!”라고 큰소리로 대답해주었다. 그래도 싫지 않았던 이유는, 서울 토박이가 전라도 촌놈과 어울려 다니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준다는 자부심 때문이었을까? 내가 그렇게 큰 소리로 대답한 이유를 그 친구가 알든 모르든 그건 알 바가 아니었다.
어쨌든 그날 그 친구네 집에 들어선 순간, 참 좋은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넓은 대문이 달린 검정 기와지붕의 한옥이었다. 대문은 반들거렸으며 큰 문턱을 넘으니 다시 좁은 공간이 보였다. 문턱이 두 개씩이나 있는 기와집에 들어가 본다는 사실이 참 신기했다. 두 번째 대문을 열자마자 왼쪽에 널찍한 별채가 있고 오른쪽에는 큼직한 본채가 있는 것이, 무언가 뼈대가 있어도 단단히 있는 집 같았다. 더 놀라운 것은 왼쪽 별채들 사이에 그 친구의 아늑한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으니(지금 생각하니 사랑방을 개조한 것), ‘도대체 이 친구는 얼마나 복이 많아서 이처럼 좋은 집에서 살고 있을까?’ 부러운 생각이 들며, 사과 상자로 책상과 부엌살림 도구를 대신하던 나로서는 그저 감탄스럽기만 했다.
그 친구가 나를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에 가지런히 놓인 책들과 넓은 책상과 안락의자는 나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책장 옆의 큼직한 스테레오 전축과 녹음기도 눈에 띄었다. 벽장에 가지런히 개어 놓은 비단 이부자리들도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였다. 깔아놓은 신문지 위에 그릇 몇 개 올려놓고 밥을 먹으며, 사과 상자 위에 몇 권의 책을 꽂아놓은 내 환경과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았다.
그뿐인가? 그 친구는 나를 다시 건너편 본채로 데려가더니 간식을 내어 놓았다. 노란 버터와 비스킷을 가져와서 비스킷에다 버터를 발라주며 먹어보란다. 노란 버터가 발라진 비스킷은 입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아버렸다. 젓갈이나 김치 먹던 입으로 그 달콤하고 감미로운 비스킷을 마구 먹어댔다.
그때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친구의 어머니였는데 한복을 곱게 차려입으신, 자그마한 키의 미인이셨다. 친구가 그의 어머니께 “목포에서 서울로 유학 온 같은 학과 친구이다.”라며 나를 소개했다. 그의 어머니께서는 내 인사를 받으시고 사무적으로 대답하신 후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런데 내 인사를 받으시는 그 어머니의 모습이 왠지 석연치 않았다. 시골 어머니들 같으면 그토록 무덤덤하게 인사를 받지도 않거니와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에 사는지 정도는 최소한 묻는 게 일반적인데, 그러한 시골 어머니들에 비하면 너무나 냉정한 느낌이 들었다.
비스킷을 너무 많이 먹어 버렸나? 나는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안방에서 그 어머니가 친구를 부르셨다. 친구가 안방에 들어가더니 한참 만에 나와서 주변 정리를 대충하고는 곧바로 자기 방으로 나를 데리고 왔다. 나는 불안하기도 했으나, 그 친구는 무표정한 얼굴로 전축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곡명은 몰랐지만 은은한 교향곡 같았다.
끼니때가 되면, 으레 밥 먹고 가라고 인정을 베푸는 시골 어머니들과는 달랐고, 불안한 나머지 나는 그의 어머니께 아르바이트를 핑계 대며 집에 가겠다고 정중히 인사드리고 그 집을 나왔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어머니가 왜 그렇게 내 인사를 냉랭하게 받으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김용규는 영리하고 재주가 많은 친구이다. 서울에서 일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화학과에 합격하여 한 학기를 마쳤다. 그러나 자기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그 이듬해 해군사관학교에 합격하여 또 한 학기만 다녔다. 군대의 길이 자기한테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후 스스로 퇴교해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남들이 안 하는 공부를 해보겠다고 요업공학과를 선택했다.
일류 고등학교에서 일류대학교에 진학하여 다니다가 다시 최고 엘리트 집단인 해군사관학교를 싫다 하고, 이른바 이류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어떻게 보면 비정상 같은 정상인이었다. 그런 데다, 대대로 뼈대 있는 집안의 막내둥이다 보니 다른 학생들보다 용돈은 물론 일상적인 지출, 등록금 납부 등 아무 어려움이 없는 친구였고 성격도 순수했다.
그런데 용돈도 별로 없이 등록금 때문에 늘 불안에 떠는 전라도 촌놈과 친구가 되어준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고맙고 알 수 없는 비밀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