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이민 초청
그 와중에도 서울에 계신 부모님께서는 어떻게든 이민 초청을 해보라고 주문하셨다. 백호주의에서 벗어나려는 호주정부의 이민정책 중, 부모를 초청하여 영주하게 하는 것은 심사대상 제1순위였다. 그 덕분에 호주에 이민 가는 한국인들의 숫자가 조금씩 늘어남과 동시에 불법체류자도 부쩍 많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월남전에 파견되었던 근로자들이나 현지 제대군인으로 월남에 남아 활동하던 한국인들이 관광비자로 호주에 갔다가 관광기간이 끝나면 불법으로 남아 한국인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갔다. 또한, 정식으로 기술이민 절차를 받아 한국에서 호주로 입국하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졌다. 그들은 헬리콥터 조종사, 태권도 사범, 자동차 정비기술자 등이 주를 이루었다. 내가 이사 간 캠프시 에는 월남, 브라질, 태국 등에서 간 불법이민자들과 정식 이민절차를 밟아 한국에서 간 사람들이 주로 정착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일정한 직업 없이, 자식들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제대로 받지도 못하시는 우리 부모님을 그곳으로 이민초청 하면 그분들의 여생에 큰 걱정은 없을 것도 같고, 현진이를 여기저기 남의 손에 맡기는 문제도 해결될 것 같아서 일단 부모님을 이민초청 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아버지는 60세가 넘으셨고 어머니는 60세가 가까워져, 그리 연로하신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이민초청장을 보냈다.
내가 사는 캠프시 에도 한국인들의 숫자가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현진이를 보살펴 줄 한국인 보모를 찾으면, 아내도 다시 직장에 다니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 시기에 한국인 헬리콥터 조종사 가족이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에 이민 정착을 했는데, 그 부인은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가사에만 전념하고 있어서 현진이를 부탁해 보았다. 다행히 그분께서 현진이를 돌봐주시겠다고 하셨고, 현진이로서는 또 어려운 일과가 시작되었다. 현진이 나이가 4살이 넘었기 때문에 그 부인의 도움을 조금만 받으면 유치원에 들어갈 수 있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내는 시내 중심가에 있는 의류회사에 취업했다. 호주에서 생산되는 원단으로 아동복을 만들어 호주 전역에 판매하는 회사였다. 아내는 판매 송장(Invoice) 전담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크게 전문성을 요구하는 일은 아니었다.
호주출신 존 브라운, 한국명 변조은 목사
우리가 일요일 예배를 드리러 호주교회에 가면, 심심찮게 한국이민자들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호주교회 내의 한국인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1973년 9월경으로 기억된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호주인 존 브라운 목사(Rev. John Brown)가 나한테 전화를 걸어왔다. 너무나 반갑고 놀랍기도 했다. 한국명이 변조은이라고 본인을 소개하며, 자신의 양녀인 10살쯤 된 한국여자 아이를 데리고 우리 아파트(Fairlight)에 찾아왔다. 처음 만난 날 영락없는 한국사람처럼 나한테 고추장, 김, 멸치, 미역 등을 주셨는데, 많은 양은 아니어도 많이 받은 이상으로 고마운 선물이었다. 그분은 한국 마산지역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임기를 마치고 호주 장로교회 총무로 옮긴 지 얼마 안 된다고 했다.
변 목사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억양은 거의 경상도 사투리였다. 내가 처음 호주에 간 무렵 만났던 호주장로교단 스티키 총무(Rev. Stycky: 서덕기)의 후임자였다. 서덕기 목사한테서 내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서덕기 목사가 내가 사는 곳을 어떻게 알고 알려주었는지는 지금도 궁금한 일이다.
내가 서 목사를 처음 만났을 때, 혹시 나중에라도 취업을 부탁하기 위해 내 이력서와 소개서를 주었었다. 아마도 내 정보를 서 목사한테서 받았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호주에서는 사람 이름만 알면 전화번호부(White Page)를 통해 주소와 전화번호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변 목사의 주선으로 여러 한국인들을 만나
암튼, 변조은 목사와 나는 호주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그와 대화를 하니 어찌나 속이 후련하던지! 대화 중, 내 장인이 미국 선교부에서 건축 일을 하셨고, 처남은 장로교회 목사로서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후 전방에서 군목으로 복무 중이라는 것과 이제 한인들이 점차 늘어가는 추세이므로 한인교회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그렇게 그날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하다가 헤어졌다.
변 목사를 만난 이후에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사했고 직장도 옮겼다. 그리고 대학원 공부시간에 쫓기느라 그분과는 한동안 연락할 수가 없었다. 1974년 어느 날(한여름으로 기억됨), 변 목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우리 가족을 주말 점심에 초대한 것이다. 그분이 사는 곳은 스트라스필드(Straith Field)였다. 내가 사는 캠프시 와는 이웃동네 정도로 가까운 곳이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그분 댁으로 가니 변 목사가 반갑게 맞아주었고, 거기에 이미 한국사람 몇 명이 초대받아 와있었다.
한 사람은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최근에 호주로 들어왔다는 Y박사였다. 그는 시드니 북부에 위치한 맥쿼리(McQuary)대학교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 중이었고 두 아들과 부인도 소개해 주었다.
또 한 가족은, 호주 시드니대학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마치고 호주 국립연구소(CSIRO)에서 연구하는 Y라는 사람이었다. 역시 부인과 딸도 소개해 주었다.
미국에서 온 Y 교수(작고)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경제기획원 재직 중 미국으로 유학 간 경력의 소유자로서,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 당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맥쿼리대학교의 전임강사였다. 호주에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부인 역시 한국의 KS라 불리는 명문 코스 출신이었다.
한인교회 창립 필요성에 동감
호주 국립연구소에서 연구하는 Y박사도 서울농대를 졸업하고 그곳으로 유학하여 영구 정착한 가족이다. 부인 역시 서울에 있는 이화여자대학교 출신이었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는 비교가 되질 않았다. 나를 소개하면서 내가 호주에 가게 된 과정을 간단히 설명하였다.
변 목사 댁에서의 점심 식사는 마치 오랫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이 다시 만난 것처럼 분위기가 좋았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서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호주에 한국인들이 증가함에 따른 한인교회의 필요성이었다. 변 목사가 그날 대화의 결론에 해당하는 말을 했다. 오래전에 나하고도 같은 얘기가 있었고, 그날 대화에서도 다들 공감하니, 여건이 허락되면 한인교회 창립을 서두르는 쪽으로 합의하자고 했다.
오히려, 한국인인 우리보다 변 목사가 그 문제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날 합의된 바로는, 변 목사가 교회예배당을 주선하기로 하고, Y교수는 교회예배 운영 전반을 준비하기로 했으며, 나는 교회 서기직을 맡기로 했다. 교회의 운영체제상 Y교수와 내가 양쪽 기능을 맡았고, 변 목사는 한인교회 담임목사 역할을 맡게 된 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