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 때 공장장이 나를 불렀다. 이번 합병에 자기는 회사를 그만두고 아주 다른 회사로 옮긴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도 내 대학원 문제에 대해 사장한테 건의했으니 기다려 보라고 했다. 나 같은 존재는 회사끼리 합병하는 데에 있어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그냥 도매급으로 합병해서 상대방이 받아주면 그곳으로 가는 것이고, 안 받아주면 직장을 잃어버리고 끝나는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속담처럼 우는 아이에겐 젖을 먹이는 수밖에 없다. 대학원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 사장님, 회사 여비서, 그리고 공장장 앞에서 징징 울었기에 여기까지 거론이 된 모양이었다.
여 비서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작별
사장이 또 나를 불렀다. 사장은 내 대학원 과정을 충분히 고려하여, 합병하는 곳으로 보내지 않고 시내 근처의 화울러 포터리(Fowler Pottery) 회사에 다닐 수 있도록 그 회사와 합의했다고 통보해주었다. 사장의 배려가 없었으면, 합병과 전혀 관계없는 다른 회사로 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 일 역시 회사 여비서의 역할이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나는 사장에게 감사하다는 말씀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그날 오후 늦게 회사 여비서를 만났다. 지금까지의 진행과정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사장이 내 처지를 고려하여 대학원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내준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그동안 도와준 것에 감사하다고 하니, 자기는 할 일을 했을 뿐이고 결과는 내가 운이 좋았다는 공식적인 답변으로 매듭지었다.
이제 큰불은 껐지만, 나머지 잔불 정리가 많이 남아있었다. 사실 그때 그 회사에서는 내 업무가 잘 정착되어 있었고 실험실은 혼자 운영하다시피 자유로워서 대학원 수업에 어느 정도는 융통성이 많았다. 그러나 옮기는 회사에서 또 다른 통제를 받을 생각하니 기쁨이 반쪽으로 줄어들었다.
이사 등 새로운 준비
다시 이사해야 할 아파트도 알아봐야 하고 아내도 일단은 직장을 접어야 했다. 회사 직원들도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여비서 조안 마빈 역시 떠날 날이 다가왔다. 그녀는 나에게 당부를 잊지 않았다. 새로 정착하면 자기한테 꼭 연락하라고……! 나는 솟구치는 감정을 억제하면서 정착되는 대로 연락하겠다고 그녀와 이별에 인사를 나눴다. 그녀는 얼마 후 시드니 근처의 휴양지인 불루마운틴(Blue Mountain)으로 이사하여 여생을 보내겠으니, 가능하면 자주자주 연락하라 하고 떠나버렸다. 내게 큰 의지가 되어준 사람을 떠나보낸 가슴 저린 하소연을 나 스스로 달래야 했다.
나도 서두를 때가 되었다. 먼저 새 직장으로 인사차 찾아갔다. 나는 시험실 소속에 품질관리시험 담당으로 배치되었다. 품질관리시험에는 책임자와 일일 공정관리자가 있었다.
책임자는 론 베이리(Ron Baiely)라는 영국인이었다. 또 다른 시험실에는 실장과 세 명의 연구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연구개발 쪽이었다. 사실 내가 가야 할 곳은 거기였는데, 왜 품질관리 부서에 배치되었는지 첫날부터 불만스러웠다.
내 업무는 위생도기라는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원료를 시험하고, 원료와 물(Water)을 혼합하여 분쇄(Milling)하고 난 액상혼합물(Slip)의 안정점검 시험, 그 시험결과를 정리하여 책임자에게 보고하는 일이었다. 실험실 주변 분위기는 여기저기 지저분하고, 공장 품질관리라는 이유로 공장 내부에 자리 잡고 있어서 매우 시끄러웠다. 업무 도중에 공장 각 부서의 책임자들이 실험실에 들어와서 론 베이리 책임자와 시끄럽게 대화하니, 책을 볼 수 있는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새 직장 <화울러 포터리(Fowler Pottery)>로
새 직장 분위기를 파악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예상대로 마음은 무거웠다. 그래도 석사학위 논문 방향을 정하는 일과 새 직장 근처로 이사하는 일을 서둘러야 했지만, 출근하면서 부동산 소개업소를 찾아다닐 수가 없었다.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대학원 출석을 허락하는 날은 도서관으로 가는 게 아니라, 적당한 아파트를 찾느라 시간을 소모하기 일쑤였다. 문제는 회사 근처의 아파트 대여료였다. 회사 근처(Marrickville)는 매주 받는 급료의 40~50%를 지급해야 할 정도로 비싸서 비교적 저렴하면서도 교통이 편리한 곳을 찾아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지금은 한인 지역으로 불리는 캠프시(Campsie)로 정했다. 시드니 중앙역에서 기차로 약 25분 정도 걸리는 곳이다. 거기는 이탈리아, 레바논, 인도, 그리스 기타 국가들의 조그만 메트로폴리탄 지역이다. 결국, 그 지역에 방 2칸에다 부엌이 딸린 아파트를 주당 25불에 대여하고 이사를 했다. 아내는 새로운 지역에서 정착할 때까지 휴직하며 현진이와 시간을 보내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로 하였다. 현진이는 너무 행복해했다.
새 직장에서는 출근부에 사인하자마자 숨 쉴 틈도 없이 일을 시키면서 관리감독을 했다. 내가 직장을 옮긴 것은 회사 운영진들끼리 결정한 일이었기에 중간관리자들이 내 개인적인 사정을 봐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먹고사는 문제와 대학원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고 견디는 것 외에 다른 수단이 없었다.
감독의 드러나지 않는 차별
대학원 공부를 위해 금요일에는 어김없이 결근하는 검은 머리 코리안이 그들로부터 좋은 인상을 받을 수가 없었다. 다른 직원들은 주당 40시간을 꼬박 일해야 하는데, 32시간만 일하고 똑같이 월급 받는 나는 회사로부터 특혜를 받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 특혜가 그전 직장에서 이미 허가받은 사안일지라도, 시험실에서 근무하는 다른 동료들이 불평하는 것이 나로서도 이해가 되었다. 나는 한 사람씩 붙잡고 사정을 얘기했지만, 대학원 가는 것에 대한 그들의 질투심에 내 저항력이 서서히 약해져 갔다.
특히, 나를 관리 감독하는 론 베이리 실장의 드러나지 않는 차별 대우에 하루에도 몇 번씩 똥물까지 올라올 듯한 심정이었다. 그의 임무는 품질관리였는데도, 틈나면 주변 청소 일까지 주문하니 내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와 부딪히면 결국 나만 손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론 베이리 실장보다 높은 상관에게 하소연할 기회도 가질 수 없는 불쌍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때 조안 마빈 여비서 같은 사람이 있다면 문제가 해결될 듯도 했지만, 그런 사람도 없었다. 물론, 내 불편한 태도가 윗사람한테 좋게 보고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나도 사람이고 감정이 있는 이민자다. 불안한 생활 속에서도 무언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시간이 자꾸 흘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