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또 어려운 일이 닥쳤다.
현재의 수입으로는 도저히 장래가 보이지 않는다며 아내가 직장을 갖기로 한 것이다. 한 사람 번 것은 생활하고, 한 사람 번 것은 모아서 집을 마련하자는 의견이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제 2살이 좀 지난 현진이를 어떻게 보육할 것 인가였다. 가장 흔한 일은, 집 근처 어린애를 보살피는 집에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맡기는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내는 현진이를 맡기고서라도 취업하기로 작심한 듯했다. 현진이를 생각하면 안 되었고, 우리의 장래를 생각해보면 아내의 생각이 옳았고…. 갈팡질팡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래도 아내는 이곳저곳 열심히 수소문한 끝에 나의 회사 근처에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일자리는 스패스틱 센터(Spastic Center)라는 곳인데, 신체 장애인들이 제품을 만드는 일종의 국가복지시설 기관이었다.
현진이를 육아 도우미에 맡기고
이제 현진이를 남의 손에 맡겨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우리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현진이를 맡길 수 있는 육아도우미(Baby Sitter)를 구했다. 어린애를 호주 아주머니에게 맡기고 아내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2살짜리 현진이를 맡기려면 새벽부터 서둘러야 했기 때문에 아침이면 우리는 무척이나 바빴다. 현진이는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고 또 울었다. 울부짖는 어린아이를 호주 아주머니 집에 맡겨놓고 일자리로 떠나는 마음은 뭐라고 말을 하기 어려웠다. 어린아이를 맡겨놓고 직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우리는 서로 말을 건네지 못했다. 이제는 3명이 다 고생길에 들어선 것이다.
더구나 내가 대학교에서 수강하는 날은 아내의 퇴근이 정말 복잡했다. 호주 교통 시스템은 버스 연결이 매우 느려서 한 번 버스를 놓치면 30 ~40분은 기다려야 하는데, 택시도 그다지 돌아다니지 않는다. 내가 대학원 가는 날, 아내가 버스를 갈아타며 시간 걸려 현진이에게 도착하면 호주 아주머니는 대놓고 싫어했고, 어린아이는 목이 다 쉬고 지쳐 기진한 모습을 종종 발견하였다. 시간이 지난 만큼 조금 더 보상해주겠다고 해도 정해진 시간에 현진이를 데려가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무기력하게 한국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미 ‘D 공전’ 교수 1년 휴직은 퇴직으로 처리되어 버렸다. 내가 국제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고 얄궂게 만족하는 모든 친척들의 분위기 또한 내가 한국에 되돌아갈 수 없는 이유에 한몫을 더하였다. 직장생활도 하고, 대학원에도 진학하고 누가 들어도 나는 성공적인 이민자라고 볼 만하였다.
아내는 직장으로 나는 직장과 학교로, 생지옥 같은 생활
생지옥 같은 생활 중에서도 시간은 흘러 2학기를 맞이하였다. 현진이는 한국에 있었으면 벌써 유아세례를 받았어야 했을 시간이 지났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젊은 미남 심슨(Simpson)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우리 집 근처의 ‘맨리(Manly) 장로교회’에 출석하였고, 그 목사는 틈이 생길 때마다 우리 집에 들러 어려운 처지의 이민자들에게 기도와 위로로 힘을 북돋아 주었다.
아내는 바쁘고 고달픈 일상생활 중에도 교회 성가대에 열심히 참여했다. 교회는 대부분 노인들이 주축을 이루었기 때문에 젊은 여자의 찬양대 참여는 칭찬받을 일이었다. 아내가 영어를 잘해서 찬양대에 나간 것은 아니고, 찬양곡이란 어느 세계에나 통하는 국제 언어였으니 큰 어려움은 없어 보였고, 그렇게 해서라도 고달픈 외로움을 달래는 듯했다. 그런데다 아내는 천성적으로 성대가 곱고 한국에서 오랫동안 찬양대 활동을 한 경험이 있어서 찬양대 참여 자체를 즐거워했다.
현진이가 아파서 도저히 호주 아주머니에게 맡길 수 없을 때, 우리는 심슨 목사 사모님에게 아주 가끔 부탁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 사모님은 속내야 어떻든 가끔은 보살펴 주셨지만, 부탁을 자주 하는 것은 큰 무례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지금 나이 40을 훌쩍 넘긴 현진이에게 그때의 어려웠던 상황이 가끔 미안하게 생각된다. 그 시기에 현진이는 맨리 장로교회 심슨 목사의 인도하에 유아세례를 받았고, 세례식 때 색동 한복을 입은 현진이를 모든 교인이 신기하게 바라보며 손잡아 보기도 하였다.
어린 현진이가 남의 손에서 커가는 것도 어려움이 있었지만, 가끔 아파서 우리 두 사람이 밤샘 간호를 할 때가 더 힘들었다. 상황이 급해서 병원 응급실에 찾아가 응급처리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두 사람 중 누군가는 다음날 현진이를 집에서 보살펴야 할 때도 잦았다.
강의를 따라가는 것도 공부도 너무 어려워
2학기가 시작되자, 교수들의 강의를 따라가는 것도 문제였지만, 숙제가 더 많아져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찾아야만 했다. 일반 학생들은 도서관 출입이 자유롭지만, 나는 직장인이자 학생 신분이어서 시간상 그들만큼 도서관 출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브라이언에게 의지하였고, 또 그는 내 자료까지 찾아주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리포트 숙제는 넘어갔고, 실험보고서는 브라이언이 고쳐서 제출하기도 한 것이다.
2학기에도 교수님 강의를 소화하는 어려움은 여전했다. 언어문제가 하루 이틀, 아니 1년 2년 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어서, 여전히 노트도 브라이언의 도움을 받았다.
암기력 역시 1학기보다는 더 요령이 생겼다. 무조건 다 암기하진 않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암기하였기 때문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현진이가 ‘어린이집’에서 종일 머무는 것이 안타까웠고, 내가 학교에 나가는 날이면 아내의 퇴근 때문에 현진이를 데리러 갈 시간을 맞출 수 없어, 할 수 없이 우리는 다른 육아 도우미를 찾아야 했다.
마침 우리 집에서 아주 가까운 동네 아주머니가 현진이를 맡아 보살펴주기로 하였다. 불과 몇 분이면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그래도 현진이는 우리한테서 떨어져 가기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럴 때마다 아니 매일 아침 맡길 때마다 울부짖는 현진이를 생각하면, 도무지 내가 왜 이렇게 무리수를 두면서 살아야 할까 하는 착잡한 심정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현진이를 강의실로 데리고 가는 일까지
2학기 어느 날, 하필이면 수업을 받으러 대학원에 가야 할 금요일 아침에 현진이를 맡기러 갔더니 아주머니가 급히 병원에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쩌랴? 아내는 예정대로 출근해야 했고, 내가 현진이를 데리고 학교로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현진이는 우리 옆에만 있으면 울지 않기 때문에 내 옆에 끼고 강의를 들으면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현진이를 학교로 데리고 갔다. 강의실에 현진이를 데리고 간 것이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이었다. 교수가 나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기에 급한 사정을 설명했다. 교수는 조용히 “아이를 데리고 강의를 받을 수 없으니 지금 곧 나가라.”라고 말했다.
“× 새끼!” 화가 극도로 치밀어 현진이를 데리고 나와서 그날 수업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후에 안 사실이었지만, 대학교 규정에 수강생 이외에는 특별히 초대되지 않은 이상 누구도 참석할 수 없게 되어 있다고 했다. 그렇더라도 융통성이 전혀 없고 고집스러운 교수가 그 규정을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도대체 내가 무얼 얼마나 잘해보려고 이 고생스러운 삶을 살아야 할까? 여러 가지로 번뇌가 일었다. 맞벌이를 하니 어린 현진이에게는 미안했지만, 표면적으로는 형편이 조금씩 나아졌다. 늘 사주고 싶었지만 쉽게 사줄 수 없었던 장난감도 현진이에게 안겨줄 수가 있었다.
더 좋은 사람이 없을까 늘 생각은 했지만, 당시 형편으로는 그 아주머니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