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나는 결국 NSW 대학교 대학원의 학사인증 과정 입학 수속을 진행했다. 이제 합격 여부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 인생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호주인 조안 마빈(Mrs. Joane Marvin)이라는 회사 여비서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민 전부터 계획했던 외국의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어떻게 입학 수속이라도 해볼 수 있었겠는가? 친어머니 같기도 하고 장모님 같기도 하고, 선생님 같았던 그분!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인 중의 은인이었다. 영어도 서툴고, 이민자금도 많이 가져가지 못한 검은 머리 동양인…, 어느 것 하나 도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지만, 내 고통을 긍정적으로 들어주고 괴로운 마음을 달래주며 용기를 준 영국 여성이었다.
은인, 회사 여비서 '조안 마빈(Mrs. Joane Marvin)'
지금도 생각하면 한없이 고맙기만 하다. 이제 이 세상 사람은 아닐 테고, 천국에 계실 조안 마빈!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한없이 쏟아진다. 내 인생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다. 무뚝뚝한 공장장과 완벽하게 소통을 못 하는 나 사이에서 부드럽게 어려움을 해결해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Nam, 너는 아직 젊고 예쁜 부인과 귀여운 아들까지 있는 앞날이 창창한 가장이다. 항상 즐겁게 살아야 되는 거야!”라며 용기를 북돋아 주며 가능한 무언가를 도와주려고 애쓴 사람이었다. 1973년 2월 초에 드디어 대학교로부터 학사인증과정 허가서를 받았다.
‘Admission Letter(입학허가서)’! 정말 듣고 싶은 말이었다. 서울에 있을 때 유학 얘기가 나오면, 항상 화두에 올랐던 입학허가 편지를 드디어 내가 받다니! 비록 학사인증에 불과했지만 외국의 대학교에서, 그것도 등록금이 없는 대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 일이 내 ‘덤벼 인생’의 중요한 시금석이 되었다. 그야말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달려든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1973년 3월 첫 대학원 강의
1973년 3월 첫 대학원 강의가 있던 날, 매커트니(McCatney) 교수님께서는 내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하셨다. 아주 작은 체구에 완전 백발인 또 한 분의 교수 화울러 박사(Dr. R. Fowler)는 처음 뵙는 분이었다. 대학원이라야 한국처럼 몇 십 명이 강의를 듣는 게 아니고 고작 5명이니 강의실 분위기가 더 엄숙할 수밖에 없었다.
수강과목은 ‘세라믹스-1(Ceramics-Ⅰ)’과 ‘세라믹스-2(Ceramics-Ⅱ)’였는데, 주로 보고서를 제출하는 방식이었다. 사실 두 과목이라지만 ‘세라믹스-1’에 세부 과목이 2개, ‘세라믹스-2’에도 2개의 세부 과목이 포함되어 있어서, 몇 년이 걸리든 네 과목을 이수해야 했다. 여기서 크레딧(Credit)이 평균 70% 이상이어야 내 인생의 목표가 달성되는 것이었다.
대학원 첫날의 수업은, 나의 세라믹스(Ceramics)에 대한 기본지식이 부족한 데다 교수님의 강의를 듣기에는 역부족이어서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라고 느껴졌다.
한국에서는 미국사람과 대화한 경험도 있고, 통역 같은 것도 해보았으므로 제법 영어 좀 하는 사람으로 대접받았지만, 호주에서 이민생활을 시작하면서는 이상할 정도로 영어의 벽이 높아지는 느낌이었다.
왜 그럴까? 이유는 한국에 있던 외국인들은 본국에서처럼 자연스럽게 영어를 하기보다 한국인인 내 수준에 맞춰서 상대해준 결과라고 생각되었다. 즉, 어린아이의 수준에 맞춰 말을 하는 엄마와 아이가 좀 더 쉽게 대화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영어의 장벽으로 인한 공부의 애로
대학원 수업을 그런 식으로 잘 알아듣지 못한다면 낙제는 불 보듯 뻔하여 새로운 길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내 옆에서 수강하는 학생에게 최대한 접근하여, 그 친구의 노트를 빌려서 암기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날 배운 것들을 일주일 동안 반복하여 쓰면서 조금씩 익혀갔다. 교수님 강의를 알아듣는 척은 했지만, 실제로는 눈어림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대학원 수강생 중에 이탈리아계 이민자 후손으로, 호주에서 태어나 그곳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이도 젊은 브라이언 매가니(Brian Magani)는 노트뿐만 아니라, 내가 모르는 것을 물으면 항상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브라이언은 참 좋은 친구여서 우리 집에 초대해 한국식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도 했다. 브라이언은 자기 노트를 빌려주면서 모르는 것도 가르쳐 주었고, 자기 집에 뭐 좋은 것이 있으면 나한테 주기도 하고 특히, 노트를 빌려주는 외에도 리포트(Report) 작성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예상대로, 반복하고 또 반복하여 쓰면서 외우는 것은 암기하는 데 특효약이었다. 사람이 극한에 달하면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책 한 권정도 분량의 당시 암기 노트를 지금도 보관 중임). 회사에서도 업무에 지장이 없는 한 계속 암기했고, 머릿속에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암기내용을 노트에 다시 적어보며 거듭거듭 반복했다. 학사인증을 받지 못하면 내가 여기서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모멸감을 벗기 위해서라도 암기는 계속되었다.
리포트는 내가 먼저 작성하여 브라이언에게 보이고, 그가 정정해주면 다시 수정하는 형식을 취했다. 브라이언의 도움으로 리포트 역시 좋은 점수를 받았다.
바쁘게 한 학기를 마치고, 물론 기말시험도 무사히 넘어갔다. 동시에 회사에서의 업무도 철저하고 차질 없이 수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