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가기 전에, 기회가 생기는 대로 그곳 대학교에 진학하려던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지만, 그 계획은 여전히 마음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내와 현진이를 보려고, 회사 여비서가 예쁜 카드와 간단한 선물을 들고 우리 집을 방문했다. 참으로 고마웠다. 아내에게 호주 정착에 필요한 안내책자 같은 것도 갖다 주고 현진이에게는 간단한 장난감도 사주었다. 그녀는 또한, 회사 직원들에게 아내와 현진이의 이야기를 서슴없이 전하기도 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공부를 할수 있는가?
어느덧 세 식구가 합류한 지도 6개월이 지났다. 호주 오기 전부터 꾸던 꿈을 이루는 일이 쉽지 않았다. 직장과 가정생활을 우선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는 회사 여비서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혹시 나도 이곳 대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그러자 그녀가 얼른 대답하기를, “회사 규정상, 정규직 직원이 대학교에 입학하거나 편입하면 일주일에 한 번은 대학교에 출석할 수 있게 되어있다.”라는 것이었다. 놀라운 정보였다.
그러나 과연 회사규정대로 내가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을지는 대단히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첫째, 회사에 입사한 지 1년도 되지 않았고 둘째, 영어로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점이었다.
나는 다시 그녀에게 “내 경우에도 그런 혜택을 받을 수 있을까요?”라고 묻자 그녀는 다시 친절하면서도 또렷하게, 내가 근무한 지 얼마가 되었든 현재 회사 정규직원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필요하다면 자기가 직접 테드 사장(Mr. Ted Bett)에게 나의 대학 수강 가능 여부를 물어봐 주겠다고도 했다.
테드 사장은 전형적인 영국신사였다. 회사에 오면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하고 여기저기 둘러보았으며, 실험실에 반드시 들러 제품 품질 시험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리고는 회사 운영진들과 회의를 마친 뒤 가곤 했다. 사장이 회사의 3분야 업무를 총괄하되, 공장일은 공장장에게, 행정업무는 여비서를 통해 보고받는 정도로만 나는 알고 있었다.
공장장의 승낙도 거절도 아닌 대답
1972년 11월 초쯤이었다. 출근해서 품질시험을 하던 중, 공장장이 나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 역시 러시아인 특유의 무표정과 무뚝뚝한 어투로, “이곳 대학교에 입학해서 더 공부할 생각이 있느냐?”라고 묻는 게 아닌가? 정말 뜻밖의 질문이었다. 얼마 전에 회사 여비서로부터 회사 규정에 대해서 들은 것이 전부인데, 어느새 공장장한테도 내 학교 진학문제가 보고된 것이다. 한편, 내 직속상관은 공장장인데 왜 자기한테 먼저 의논을 안 했는지를 따지고 들면 그에 대한 답변이 궁색할 터였다. 여기까지 틀림없이 여비서의 개입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기회가 주어진다면 공부를 더 하고 싶다.”라고 대답하며, 그쪽에서 어떻게 생각을 하던 내 의사는 분명히 밝혀두었다. 공장장은 이런저런 말을 하며 내 학교 진학문제에 대해 “호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영어도 미숙하고 회사업무도 많은데,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게 좋겠다.”라며 승낙도, 거절도 아닌 그야말로 알쏭달쏭한 대답을 했다.
나는 그날 퇴근 직전에 회사 여비서를 만나 그 얘기를 했다. 그녀는 천천히(아마도 내가 완전히 알아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내게 말하기를, 먼저 회사규정을 찾아서 테드 사장에게 설명했고, 이 규정대로라면 ‘Nam도 대학에서 수강할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어느 민족보다도 법과 질서를 잘 지키는 영국인들의 기본자세를 읽을 수 있었다. 그런 규정을 무시할 수 없음을 사장 자신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비서가 테드 사장에게 ‘Nam이 그곳 대학교에서 더 공부하고자 하니, 회사규정대로 일주일에 하루 결근을 허용해 달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나는 놀랍기도 하고 어쩌면 내 덤벼 인생이 다시 시작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그렇게까지 내 문제를 회사에 건의한 것은, 영국인들의 틀에 박힌 사고방식 때문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인들은 기회가 되면 가능한 남을 도우려는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누구든 법과 규정을 지켜야 한다는 정신이 확고했다. 나는 그녀에게 감사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하나님께 기도로 간구하자...
그날 밤에 집에 와서 아내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더니, 아내는 ‘그렇게 어려운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듯 반신반의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일주일 내내 학교 숙제에 매달린다는데, 과연 일주일에 하루씩 공부하여 공학석사 학위를 받을 수 있겠느냐는 뉘앙스였다. 그렇게라도 해서 학교 진도를 잘 따라갈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중도에 탈락하게 되면 회사에서도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는 걱정이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해보자고 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 하나님께 먼저 기도로 간구하자는 말로 서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사실, 의지할 데 없는 낯선 환경에서 무리하게 덤볐다가 낭패를 보게 되면 결국 모든 책임이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포기할 마음은 결코 없었다. 한 번 덤벼보자는 의지가 자꾸 고개를 쳐들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공장장이 또 나를 불렀다. 내 예감이 썩 좋지 않았다. 만약 대학교에 진학할 생각이면 차라리 퇴직하라고 하면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하며 그의 방에 들어갔다. 공장장은 다시 대학 얘기를 꺼냈다. 회사업무와 공부를 병행하려면 학교생활이 매우 힘들고, 영어 실력도 미흡한 데다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을 텐데 과연 두 가지 역할을 해낼 수 있겠는지 다짐을 받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1~2시간씩 연장 근무를 해서라도 법정 근로시간인 40시간을 채우겠으며, 영어실력은 당장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어차피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장기적인 숙제이다. 그것 역시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니 가능한 대학원 진학을 허락해주면 좋겠다, 그러나 기회를 줄 수 없다면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겠다고 미리 선수를 쳤다. 사실 공장장이 두 번씩이나 나를 불러서 대학원 진학을 확인한 것은 이미 테드 사장에게서 어떤 언질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회사 규정대로라면 대학원 출석하는 8시간도 회사 업무에 해당하는 셈이다. 8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하루에 1~2시간 연장근무를 해서라도 공백을 채우겠다는 것은 회사규정에 어긋나는 셈이다. 따라서 내가 하루 1~2시간 더 회사에 남아서 일하게 되면, 공장장 입장에서는 연장근무 수당을 지급해야 할 의무가 생긴다. 즉, 내가 하루 1~2시간 연장근무 하겠다고 제안한 것은 공장장에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1~2시간 연장 근무를 해서라도 대학공부를 하겠다는 의지
나로서는 하루 1~2시간 더 근무하더라도 대학원 진학의 뜻을 굽히지 않았지만, 공장장으로서는 회사경비가 더 지출될 수 있는 상황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가 확실한 답을 주지는 않았으나, 나는 곧바로 시드니 한복판에 위치한 New South Wales 대학교(당시에는 NSW State 지원으로 운영되었으므로 NSW 주립대라고 불렀음)에 석사과정을 문의했다.
학교에서는, “호주인이면 누구나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지만, 입학관리와 대학교육 과정이 너무나도 어렵다.”라고 했다. 대학교에 입학하려면 먼저 고등학교 졸업 조건부터가 달랐다. 고등학교 졸업장에 고등학교 졸업증(HSC, Higher School Certificate)를 받아야 대학교 입학이 가능하고, 일단 대학교에 입학하면 수많은 보고서 작성과 시험을 거쳐야만 졸업할 수 있으므로 도중에 절반 정도가 탈락하거나 중도 포기하는 학생이 많다는 것이었다.
사실 호주에서는 목을 매며 대학교를 졸업하지 않아도 일할 수 있는 여건이 좋다. 그래서 중도 포기나 탈락이 되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도 한다. 더구나 그렇게 까다로운 학부과정을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할 정도면 웬만큼 기본실력은 갖춰진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