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싶은 김치
한국에서 대학생활 4년 동안 자취생활을 한 경험은 있지만, 막상 외국의 전혀 다른 환경에서 혼자 생활해보니 어려움이 있었다. 그 중 한 가지는 김치를 담그는 일이었다. 쌀은 슈퍼마켓이나 시내에 있는 중국인들 시장에 가면 살 수 있고, 일본가게에서 일본식 반찬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가게 반찬은 내 입맛에 잘 맞지도 않을 뿐더러 가격이 비쌌다.
주말에 어쩌다 L 씨 집에서 김치 비슷한 것을 얻어먹을 수는 있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L 씨네는 호주에 올 때 한국 고춧가루를 많이 가지고 왔고, 서울에서 더 보내올 때까지 아껴먹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 고춧가루로 담근 김치라 해도 한국에서 먹던 그 김치 맛은 아니었다.
그런저런 이유로 김치를 직접 담가 먹기로 마음은 먹었지만, 호주에서 김치 담그는 방법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나도 호주에 갈 때 미역을 포함해 고춧가루도 좀 가져가긴 했었다. 서울에 편지를 보내 김치 담그는 법을 물었더니 큰누나가 답장을 보내왔다. 소금에 절인 배추에다 각종 양념과 풀 국, 젓갈도 넣으라고 썼다. 배추는 어디에다 절이고, 각종 양념은 어떻게 조달하며, 담근 김치는 어디에 담아 숙성시킬 것인지 등 도저히 불가능한 짓이었다.
우선 김치 담을 도구가 하나도 없을뿐더러, 세 사람이 부엌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식 부엌이 아니어서 함께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해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런 방법으로 김치를 담그는 것은 아예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간단하게 무를 몇 개 정도 적당히 썰어 소금에 절인 다음 고춧가루와 파만 넣고 빈 커피 병에 담아 숙성시키면 될 것 같았다.
홍당무를 사다 어술프게 김치로 담가
일요일 오전에 교회예배를 마치고 가까운 채소가게에 가니. 아주 작은 홍당무가 눈에 띄었다. 굳이 작게 자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고춧가루 대용으로는 헝가리산 파프리카 분말이 있었다. 마늘과 파, 소금도 조금씩 샀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홍당무를 씻어서 소금물에 담가놓고 나머지 재료들을 조그맣게 썰어 두었는데 밥풀이 없었다. 밥을 해서 풀죽을 쑤어 넣으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 것 같고, 옆방의 아저씨들이 부엌을 사용할 수도 있어서 오랫동안 부엌을 차지할 수 없었다.
썰어 놓은 홍당무에다 파, 마늘, 파프리카 분말과 서울에서 가져온 고춧가루를 약간 넣어 대충 간을 맞춘 뒤 일본 된장에 버무려 빈 커피 병에 넣었다. 그리고는 세 사람 공용의 냉장고에 김치 병을 넣어둘 수 없어 내 옷장 속에 깊이 넣어 두었다. 그저 잘 익기만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병에서 거름 썩는 듯 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퇴근 후에 김치 병을 열어보니 냄새와는 달리 그런대로 묘한 김치 맛이 나기에 밥과 함께 먹어보았다. 홍당무와 기타 재료가 좀 변한 것 같았지만 최소한의 김치 맛은 느껴졌었다. 한마디로 썩은 홍당무 풀 맛이었지만 그래도 조금씩 꺼내 먹는 순간에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김치를 꺼내먹을 때마다 옆방 아저씨들이 ‘어디선가 이상한 냄새가 난다’며 중얼거렸지만, 내 건강을 지키는 일이라 생각하고 일절 대꾸하지 않았다.
집주인이 갖다 버린 홍당무 김치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김치병을 꺼내려고 옷장 문을 열어보니 그 병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기가 꽉 막혔다. 내방 열쇠는 분명히 내가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주인 외에는 그 누구도 내 방에 들어갈 수 없는데 내 보물단지 김치 병이 왜 없어졌을까? 실망하고 어이가 없어 부엌에 나와 서 있을 때 주인이 얘기 좀 하자고 했다. 나는 화가 날 대로 나서 거침없이 주인을 따라 그 집 응접실로 들어갔다.
프랑스식 영어를 쓰는 주인의 말에 의하면, 부엌을 포함한 온 집안에 무언가 썩는 냄새가 풍겨 온종일 집안 조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옆방 아저씨들도 그 냄새에 대해 불평했다는 것이다. 세 사람의 방과 부엌, 자기 집 창문까지 다 열어 놓으면 냄새가 사라졌다가도 닫으면 그 냄새가 다시 괴롭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뒤지고 또 뒤지다가 내 옷장의 커피 병뚜껑을 열자마자 구역질이 날 만큼 썩은 냄새가 나더라는 것이다. 즉시 커피 병을 뒷마당 썩은 소나무 거름구덩이에 버렸다고 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더 기가 막혔다. 그거라도 있어서 식사시간에 밥 한 그릇을 비우며 먹는 재미가 있었는데 그걸 버리다니! 주먹이라도 한 방 날려버리고 싶을 만큼 화가 치밀었다. 그래도 버리기 전에 나한테 한마디라도 의논은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주인한테 화를 냈다.
주인에게 사정해서 김치병을 보관
“당신이 아침에 식사준비 할 때 당신 부엌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아는가? 치즈 태우는 냄새를 나는 도저히 맡을 수가 없었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아주 독한 음식 같았다. 그래도 내가 당신한테 그런 불평을 한 적이 있는가? 그 커피 병에 든 음식은 우리 한국인들한테는 아주 필요한 식품이며, 썩었다는 홍당무는 적어도 하루에 한 번 반드시 먹어야 할 에너지 공급원이다. 앞으로도 나한테는 꼭 필요한 음식이니 그렇게 알라.”
나는 애원하다시피 주인에게 설명했다. 주인은 하루에 한 번은 꼭 먹어야 할 한국 음식이라고 재차 강조하는 내 설명에 귀를 기울이며 가만히 있었다. 주인이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꼭 그렇게 필요한 음식이라면, 냉장고 한 개를 별도로 뒷마당 벽에 붙여 놓을 테니 그곳에 넣어두라.”고….
마침내 주인과 합의가 되었다. 나는 그 후로 홍당무뿐 아니라 배추에다 밥풀까지 넣어서 한국 김치와 비슷한, 나만의 김치를 만들어 즐겨 먹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