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사장과 L 씨 (23화)

한국과 달리 호주는 토‧일요일은 일을 하지 않았다. 토요일까지 근무하는 한국 사람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그런데 토요일과 일요일에 내가 마땅히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일요일은 오전 중에 예배드리러 교회 가는 일 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그 당시 한인교회는 없었음).

근검 절약으로 매월 120여 불 저축

일단 외출을 하게 되면 교통비를 포함하여 돈이 드는 데다, 호주교민이라야 시드니 전역에서 전부 합해도 몇 세대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대부분 시간을 집에 있거나 먹거리를 사기 위해 잠깐씩 쇼핑하며 보냈다. 1센트라도 저축해서 내 가족들을 그곳으로 불러들여야 할 숙제가 있었기에 사실상 외출하면서 지출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주급 60여 불 받아서 자취방 대여료 12불, 교통비, 식품구매, 통신비 등을 빼면 저축할 수 있는 돈은 30~35불 남짓이었다. 그러니까 매월 120여 불 이상의 저축이 가능했다.

매주 조금씩 쌓여가는 통장 속의 액수를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게 유일한 낙이었을 뿐, 주말이라고 여기저기 놀러 다닌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가끔 M 사장하고 통화는 했었는데, M 사장 집 길 건너편에 다른 한국인 L 씨 가족이 살고 있었다. 바로 주한호주대사관에서 호주 이민관과 면접했을 때, 이민관이 언급했던 에어컨디셔너(Air Conditioner) 설계 기술자였다.

그들도 나와 비슷한 시기에 호주로 이민 왔지만, 서둘러 왔으므로 그들은 이미 정착을 한 상태였다. 나는 1년 동안 호주 이민에 대해 갈등하며 미루어왔기에 그들보다 늦게 입국한 결과였다.

L 씨는 나보다 나이가 많고, 모친까지 한국의 살림을 완전히 정리하고 호주에 들어오신 경우였다. 나는 M 사장 덕분에 그분들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가끔 L 씨 집에 가서 점심이나 저녁을 얻어먹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로서는 가장 경제적인 주말 외출에 해당되어 스스럼없이 들르곤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M 사장네와 가까운 이웃인데도 그 두 집 사이에 냉랭한 기류가 흐르고 있음을 감지한 것이다. 머나먼 이국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동포끼리 형제처럼 지내고도 남을 듯한데, 서로 가깝게 왕래하지 않는 점과 아이들도 비슷한 또래인데 그리 친하게 지내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M 사장 집에 갔다가 L 씨 집을 모른 척할 수 없는 경우도 있어서 사실상 피해자는 바로 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호주 이민사회 최초의 개척자들인 그들이 서로 친하게 지낼 수 없는 이유를 차츰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손에 꼽았던 이민 한인

1970년대 후반까지 호주 시드니에 이민 간 한국인은 공식 집계로 아홉 가족에 불과하다고 했다. 유학이나 다른 사업을 목적으로 거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정식으로 취업을 통해 이민 간 인구는 고작 아홉 가족으로 약 40여 명 정도였다. 그들은,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출신이며 호주 NSW 주 정부의 공무원으로 재직 중인 섬유기술인, 6. 25 참전 호주군과 연계되어 이민 간 호주항공사(QANTAS) 근무자, 시드니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호주 국립연구기관(CSIRO)의 연구자로 재직 중인 Y 농학박사, M 사장, L 씨, 보석기술자 C 사장었다.

이외에 호주주재 한국 상사 대표들, 유학생들, 불법 체류자들 정도였다. 그들 중 허물없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은 L 씨였고, M 사장은 가끔 만났지만, 그 두 가족 간의 껄끄러운 분위기 때문에 사실 그들을 자주 만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고향 생각이 날 때면 노인을 모시고 사는 L 씨 집에는 가끔 방문했다.

L 씨는 이른바 서울공대 졸업생으로, 한국에서 섬유회사에 근무하다가 에어컨 설계 기술자 자격으로 호주에 취업 이민 오신 분이었다. L 씨를 통해 들은 M 사장의 사정은 좀 달랐다. M 사장은 대구에서 모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일모직에서 양모기술을 익히다가 그 기술을 좀 더 공부하기 위해 일찍 호주 질롱(Geelong)에 파견 나가 상당기간 체류한 경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M 사장 학력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 후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섬유회사 모직 담당으로 근무하다가 호주에 기술 이민 오신 분이었다. 호주에 정착 후, 무역회사를 설립하여 현재 한국-호주 간 무역 업무를 하고 있었다.

고향 생각 날 땐 M 사장과 L 씨 집에 놀러가

M 사장과 L 씨의 배경을 보건대, L 씨가 학력이나 사회경력은 한 수 위로 보였지만, 사업상으로는 M 사장의 위치가 나아 보였다. 두 집의 관계가 묘하게 어긋나 있었지만, 내 마음은 노인이 계신 L 씨 집이 더 가깝게 느껴져 그 집에서 저녁 먹고 향수를 달래는 횟수가 많아졌다. 그런 상황에서 M 사장과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주말에는 시드니 근처의 해변구경, 축구경기 관람, 바닷가에서 어패류를 잡아 삶아 먹고 회를 쳐서 먹는 일도 잦았다. 한마디로 토요일이 되면 L 씨네 식구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 한구석에는 앞으로의 내 인생 설계를 위한 덤벼 정신이 막연히 싹트고 있었다.

▲ 이민 초기 이면 가끔 찾았던 시드니 근처의 해변 '본다이 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