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낳았다는 한국에서의 소식
내가 취직한 사실을 서울에 알린 며칠 후에 서울의 우리 집에서 내 실험실로 연락이 왔다.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었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출산했는데 출산 과정에서 약간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고 하셨다.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하며 곧 처가로 들어갈 예정이라고도 했다.
그때는 내가 한국에 전화하려면 전화국에 가서 국제전화를 신청한 뒤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 전화국 교환이 한국의 전화국 국제교환과 연결하고, 그 교환이 다시 통화자에게 연락한 후에야 최종적으로 통화자끼리 대화를 할 수 있는, 아주 원시적인 국제전화 연결 시스템이었다.
퇴근하고 나서 처가에 전화하기로 마음먹고, 퇴근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떨린다. 국제전화를 한 번씩 할 때마다 요금부담이 상당했다. 그리고 여주인한테 먼저 허락을 받아야만 했기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주인에게 허락을 구했다. 물론 첫 아이의 출산 때문이라는 말도 했다.
주인의 허락을 받고, 국제전화를 신청하여 이윽고 아내와 첫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아내의 목소리는 아주 밝았다. 오히려 내 건강과 외국에서의 직장생활에 대한 염려가 더 컸다. 요금 때문에 통화를 길게는 못하고, 그저 ‘아들을 낳아서 무엇보다도 기쁘다’는 축하 인사와 장인, 장모님 안부 묻는 정도로 간단히 끝내서 서운할 듯도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음으로, 화곡동 친부모님께도 연결했다. 간단한 안부만 여쭈려고 했지만 어쩌다 통화시간이 꽤 길어졌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밝았다. 그 밝은 목소리에는 ‘내 아들이 넓은 세계에 나가서 국제적인 활동을 한다’는 자부심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전화요금이 계속 올라가는 중에 식구들을 차례로 바꿔주시는 게 부담스러웠다. 끝내려고 하면 자꾸 다른 형제들을 바꿔주셨는데, 그들과 긴 대화를 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와 통화 후의 씁쓸함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혼자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국제적인 활동이라?’ 참으로 어이없는 아버지의 말씀에 화가 치밀었다. 한편은, 우리 집안에서 외국에 나가 활동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데, 아들 한 놈이 호주에 이민 가서 살게 된 것을 국제적인 활동으로 여겨 엉뚱하게도 자부심을 느끼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나로서는 이민생활 자체가 괴로웠고, 그것을 드러내지 못하는 심정이 더 힘들었다. 이제 가족의 안부에 대한 궁금증은 웬만큼 없어졌다.
이튿날, 회사 여비서에게 아들 출산 소식을 전했더니, 오후쯤 어디서 준비했는지 예쁜 ‘아기 탄생 축하카드’를 주면서 서울에 있는 아기엄마에게 보내라고 했다. 한국식 사고로는 그리 큰일도 아니었지만, 회사직원 몇 명이 축하 서명까지 하여 카드를 주어서 좀 머쓱했다. 내가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언어소통도 어려운 상황에서 그렇게까지 친절을 베푼다는 것이….
앞날에 대한 새로운 고민
세월이 흘러 어느덧 내 나이 28세. 장래가 구만리 같은 내가 그렇게 하루하루 잘 지내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지만, 한국에서 떠날 때 마음먹은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호주에서 무언가 뜻을 펼치려면 한국의 대학교 졸업장으로는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호주에서 다시 대학교를 졸업한다 해도 백인들과 동등한 조건으로 일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첫째, 영어가 백인들처럼 완벽할 수가 없었고, 둘째, 영어로 보고서 작성하는 일이 백인들처럼 능숙할 수가 없었다. 셋째, 몇 년 후에 이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보장도 없었고, 넷째, 백인들의 동양인 대하는 태도가 영원히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무언가 단계적으로 내 인생 목표를 다시 세워야 할 것 같았다. 그 계획들 속에는 D 공업전문학교에서 사표를 수리하기 전에 한국으로 되돌아가는 것, 또는 한국을 떠날 때 계획한 대로 호주에서 대학원에 입학하여 석사와 박사 학위까지 마친 후 한국으로 되돌아가는 것, 마지막 방법은, 호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전문연구기관에 취업하여 그곳에 완전히 정착하는 길이었다. 결론적으로, 다니던 직장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호주에서의 직장생활이 4개월째 접어들면서 내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졌다.
12월 셋째 주 금요일 오후부터는 크리스마스 파티 겸 연말연시 휴가가 시작되었다. 호주의 12월은 한여름인데, 12월 중순이면 크리스마스 캐럴은 물론 여기저기서 맥주 파티가 열린다. 회사에서도 크리스마스 파티를 연다고 사내 방송을 하며 메모지도 돌렸다. 수많은 맥주 상자가 회사로 실려 왔고 파티 당일에는 내가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대형 새우, 햄, 소시지 등이 준비되었다.
그날은 회사 임원, 정규직원, 생산 노동자가 한데 모여 차려진 음식들을 먹으며 떠들고 스포츠 댄스도 즐기는 모습이 마치 나이트클럽을 연상케 했다. 나는 처음으로 굵은 새우와 햄을 썰어 실컷 먹어보았다. 그날은 사장님(Mr. Ted Batt)도 참석하셨다.
사장님과의 대화와 관심
그런 특별한 날에는 직원들이 한국에서처럼 사장님, 공장장님이라고 깍듯하게 호칭을 쓰며 격식을 차리지 않는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서로에 대한 호칭이 주로 ‘너’ 아니면 ‘나’였다.
직급을 떠나 서로 이름만 부르며 친구처럼 허심탄회하게 어울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더 이상한 것은, 말단 직원들도 사장님한테 똑같은 호칭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정말 신기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테드(Ted)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다. 그분께서 먼저 내게로 다가오시더니 말을 건넸다. 새로 시작한 호주 생활이 괜찮은지, 아들 출산에 대한 축하와 아기는 잘 크는지, 자기도 영국에서 처음 이민 왔을 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는 등의 말씀을 해주셨다. 내가 정착 중인 호주 생활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것에 놀랐다. 순간적으로, 누군가가 테드 사장에게 내 근황에 대해 보고하고 있음을 느꼈다.
영국인들이 호주에 이민 가서 정착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았다. 같은 언어를 쓰고 비슷한 생활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가벼운 이사 정도로 가는데 무엇이 그리 어렵다는 건가? 영국인들이 그저 흔히 하는 인사이거니 생각했다. 그들의 마음속은 잘 모르겠지만, 따뜻한 인간미가 있고 아주 사교적인 사람들이었다. 나는 잘 지내고 있으며 서울의 갓난아기도 건강하다고 대답했다. 옆에 서 있던 공장장도 테드 사장과 나의 대화를 귀담아듣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파티는 오후 늦게 끝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