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주안동에서 신접살림 시작
온양역에서는 온천장에서 보내준 마이크로버스를 이용하여 3박 4일간의 신혼여행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결혼식장에서도, 신혼여행 중에도 내 머릿속을 꽉 채운 생각은 ‘회사에서 빌린 돈을 결혼축의금으로 충당할 수 있을까?’였다. 그러니 신혼여행이 편안할 수가 없었다. 내 복잡한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신부는 평상시와 똑같아서 고맙기도 하고 미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내 머릿속의 복잡한 계산을 쉽게 지울 수가 없었다.
집에다 시외전화를 해서 축의금이 얼마인지 물어볼 수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하면 신부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그냥 3일간 참고 견뎠다. 온양에서 3박 4일간 신혼여행을 마치고 서울행 기차를 타고 오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그 돈 생각에 무겁기만 했다.
영등포역에는 장모님이 마중 나와 계셨다. 처가에서 하루 묵고 이튿날 화곡동 우리 집으로 갔다. 부모님을 비롯한 형제들이 안방에 신랑과 새색시를 위한 음식을 차려놓고 우리를 맞아주셨지만, 인사를 마치자마자 나는 축의금이 보관된 방으로 갔다. 봉투들을 열어보는 동안에도 회사에서 빌린 돈을 갚을 수 있을지 초조했다. 계산해본 결과, 축의금 합계금에다 한 달 치 월급을 보태면 회사 빚은 완전히 해결할 수 있었다. 적어도 회사 빚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내가 피아노 교습을 하며 가계를 도와
그렇게 우리의 신혼일정은 마무리되었고, 인천 남구 주안동 사거리에 위치한 단독주택의 문간방을 전세로 얻었다. 반 평도 안 되는 부엌이 딸려있었다. 이것 역시 처가의 신세를 졌다. 그러나 어쩌랴? 소가 비벼도 될 언덕이 있으니 다행이고 처가에 고마울 뿐이었다. 신혼살림에 필요한 세간도 준비되었고 장롱과 피아노 때문에 겨우 잠만 잘 수 있을 정도로 비좁은 방이었지만, 신혼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만족할 수 있었다.
내 월급이 적어서 아내는 피아노 개인지도를 해서라도 가계를 도우려고 일을 시작했는데 수강 학생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갔다. 하지만 주인집에서는 그리 협조적이지 않아서 그 일도 오래 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주말이면 가까운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고, 틈이 나면 처가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렇게 그 해는 잘 보내고, 새해에는 교수직으로 직장을 옮겨 어려운 교직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는 고민과 희망 속에서 우리는 인천생활을 접고 서울로 이사 왔다.
교직을 얻어 서울로 이사
서울에 얻은 신혼 방은 대방동에 있는 큰 기와집 문간방이었는데 이번에는 부엌이 따로 없었다. 그 대신 방이 한 칸 더 있어서 부엌살림 도구는 방안에 따로 두어야 했다. 음식 준비를 밖에서 해야 하는데다, 시간 맞추어 두 방의 연탄을 갈아야 하는 새색시 입장에서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래도 아내는 신혼생활에 열심히 적응했고, 나는 학교로 직장을 옮겨 이른바 대학교수 생활이 시작되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나한테 ‘강의와 학생 지도에 특별히 신경 써줄 것’을 당부하시면서 학생과장을 돕는 보직을 주셨다. 학생과에서 하는 일들은 주로, 교내외에서 사고치는 학생들을 단속하는 일과 불량한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사고를 일으켜 경찰 조사를 받게 되면 그곳에 찾아가 훈방을 요청하여 귀교시키는 것들이었다.
공업학교 학생 중에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도 있었지만, 패거리를 만들어 집단싸움에 익숙한 학생들도 상당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단속하고 훈육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교장 선생님께서 그 부분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계셔서 나한테 주어진 강의시간 이외에는 학생들을 선도하는 업무에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한 번은 영등포 경찰서에서 학생 담당 지도교수를 부르기에 갔다가, 싸움에 휘말려 큰 상처를 입은 학생을 인계받아 서둘러 인근 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받게 한 일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교장 선생님의 주문
그러던 어느 날, 교장 선생님께서 또 다른 주문을 하셨다. “학교(흑석동)를 이전하게 되었는데, 새로 옮길 장소(고척동)의 부지 조성 사업에도 참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참여 요청이란, 야산을 평지로 조성하는 사업을 하려면 중장비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시절에 중장비는 유일하게도 미8군 공병단에서만 소유하고 있었다. 미8군 공병부대는 대민사업의 일환으로 학교부지 조성에는 참여할 수가 있으니 어떻게든 중장비(불도저) 협조 요청을 좀 해보라는 것이었다. 아마 교장 선생님 아들이 내가 조 대위를 통하면 좋은 방안이 있을 거라고 조언을 한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나는 상당히 어려운 과제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런 중임을 맡기셨으리라 생각하니 ‘저는 못합니다’라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동시에 그 가능성을 알아보았다. 처음 머리에 떠오른 사람은 조 대위가 아니고 신혼여행 갈 때, 본인의 승용차를 선뜻 빌려주며 친절을 베풀어 준 미국인 젠킨스였다. 그분은 미8군 소속 민간인 종사자였고, 몇십 년간 군인 신분으로 미8군의 내용을 잘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분이 미8군 산하 용산의 모 부대에 근무 중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 정확히는 모르고 있어서 나는 아내와 함께 결혼 후 처음으로 화곡동 젠킨스 씨 댁을 찾아갔다. 두 분 내외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시고 음식도 푸짐하게 차려주셔서 그날 즐겁게 보냈는데, 포도주와 치즈로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내가 중장비 이야기를 꺼냈다. 젠킨스 씨는 “한국정부와 미8군 사이에는 대민사업이 합법적으로 정립되어 있다.”라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대민사업, 즉 개인이 아닌 공적인 사업에는 중장비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공적인 사업이란 학교, 병원, 도로 등 비영리적인 사업이 포함된다. 따라서 학교장이 공식적으로 해당 기관에 협조 요청을 하면 자기가 그 기관에 알아봐 줄 수 있다고 했다.
학교에 돌아와서 교장 선생님께 그 말씀을 드렸더니, 매우 기뻐하시며 그 공문을 즉시 작성하여 직인을 찍어서 보내자고 하셨다. 나는 젠킨스 씨가 안내해준 기관의 담당자 앞으로 학교의 협조공문을 발송했다. 그리고 젠킨스 씨에게 연락을 취해 그 후속 작업을 부탁했다. 얼마 후, 미8군 김포지역 주둔 공병부대에서 연락이 왔다. 해당 공병장교가 직접 학교를 방문하여 실사하겠다는 것이었다. 거의 성공한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