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기술자를 도우며 외국 취업을 타진
미국인 기술자는 인천의 올림퍼스 호텔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가끔 저녁이나 주말에 나를 불러 맛있는 음식도 사주고 자기 회사의 국제적인 활동에 대해 설명도 해주었다. 내겐 아주 좋은 기회였다. 영어로 대화하는 것이 서툴렀지만, 그는 내가 잘 모르면 반복하여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의 옆에 바짝 붙어 다니며 도왔다. 그를 도왔다기보다는 내 장래도 생각하면서 그가 원하는 일들을 적극적으로 협조해 준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미국을 배웠고, 동시에 미국사람 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도 배우게 되었다. “미국이든 다른 나라든 내가 당신들 회사에 취직하여 일할 수 있습니까?”라고 내가 당돌하게 질문하자 그 미국인 기술자는 친절하게 여러 가지 가능성을 말해주었다. 그들의 본사는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고 캐나다, 호주, 나이지리아 등 여러 나라에서 자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니, 원한다면 자기가 알아봐 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반신반의하면서 내 취업 희망을 전달하고 그를 열심히 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 기술자가 나한테 몇 장의 편지를 보여주었다. 미국 본사에서는 관심이 없으나, 캐나다나 호주에 있는 스윈들 드레슬러 자회사에 직접 연락을 해보면, 어쩌면 그쪽에서는 나에 관해 관심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회사 담당자들의 주소와 이름 등 상세한 사항을 알려주었다.
그 얘기를 듣자 실처럼 가느다란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나는 곧바로 캐나다와 호주의 스윈들 드레슬러 담당자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편지에 ‘나는 요업(Ceramic) 기술자이며,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연구실 업무와 미국 스윈들 드레슬러 공장 한국 건설 업무에 협조하고 있다’는 식의 허풍을 섞어 설명했다. 그러면서 ‘만약 당신네 회사에서 내가 일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해 일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내 짧은 기술경력으로 보아 그들을 만족시킬 만큼의 기술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 자신도 잘 알면서 저지른 일이었다. 그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 미국인 기술자의 추천서를 동봉했다. 내가 그의 추천서를 받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추천장을 부탁하자 그는 기꺼이 응해 주었던 것이다.
편지를 보내고 얼마나 지났을까? 캐나다 스윈들 드레슬러에서 답장이 왔다. 캐나다에 올 수 있으면 와서 자기네 회사에 연락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때 만약 기회가 있으면 기꺼이 나를 만나서 내 취업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고 했다. 정말 막연하고도 답답한 내용이었다. 캐나다 회사의 답장을 곰곰이 분석해보니 크게 두 가지 문제가 보였다.
캐니다의 <스윈들 드레슬러>회사로부터 회신을 받고
첫째, 내가 어떻게 캐나다로 갈 것이며, 둘째, 만일 내가 캐나다에 들어갈 경우 확실히 취업을 보장해 주겠다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불확실성이었다. 어쨌든 캐나다에서 답장이 온 것만으로도 성공적이라고 생각한 나로서는 캐나다와의 관계를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캐나다 스윈들 드레슬러 회사에 다시 답장을 보냈다. 내가 캐나다로 가기 전에 그곳 캐나다 회사에서 내가 일을 할 수 있다는 확답을 해주어야만 한다는 내용이었다.
참으로 직선적이고 무식한 투의 한국식 편지를 보냈다. 즉, 나를 고용한다는 확답을 주어야만 캐나다 취업이민을 신청할 수 있다며 회사의 긍정적인 답변을 요구하였다. 만약 캐나다 스윈들 드레슬러에서 어느 정도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내면, 주한 캐나다 대사관에 취업이민 여부를 문의할 작정이었다.
그 당시 캐나다 대사관은 주일본 캐나다 대사관에서 한 달에 몇 번 정도 서울에 사람을 파견하여 영사 업무를 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주한 캐나다 대사관에 문의하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캐나다 회사에서 어떤 답을 보내오든 나로서는 잃을 것이 없었고, 만일 긍정적인 답을 받게 되면 캐나다와의 끈을 잡을 수도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미국인 기술자와 어느 정도 제2공장 일이 마무리되던 어느 날, 조 대위한테서 연락이 왔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총무부의 Y이라는 사람을 소개할 테니 서울에 와서 자기를 만나자고 했다. Y씨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총무부 소속이어서 건설관리단의 조 대위와는 업무상 협조가 가능한 관계였다. 업무협조상 Y씨와 늘 가까이 지내면서 그에게 내 얘기를 했고, 될 수 있으면 한 번 소개하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시간을 내주겠다고 하더란다.
조 대위로부터도 취업부탁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소개 받아
Y 씨는 조 대위한테, “부친이 서울 소재 D 공업전문학교장이신데, 이 학교를 얼마 전에 새로 인수한 관계로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은 교장 선생님을 도와드릴 젊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전문학교라고 불렀지만, 사실상 2년제 공업전문대학이었다. 조 대위가 적극적으로 약속을 주선하여 서울 시내 모 식당에서 세 사람이 자리를 함께했다.
만나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보니 Y씨도 ROTC 동기생이었다. 나와 같은 병과는 아니었지만 같은 동기생이라는 점에서 반가웠고, 어느새 우리는 가까운 친구사이가 되어 버렸다. Y 씨는 참으로 대단한 젊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구도 단단하게 단련되어 보였으며 태권도, 합기도도 5단 정도 보유하고 있었다. K대 운동권 출신답게 현 시국을 바라보는 논리 역시 예리하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Y 씨는 서슴없이, 다음 날 그의 부친께 나를 소개하겠다고 약속한 후 헤어졌다.
며칠 후에, Y 씨 부친을 만날 약속이 정해졌다. D 공업전문학교에서 처음 만나 뵌 Y 씨 부친은 체구는 작았는데, 학교장(학장) 직책이 인쇄된 명함을 내게 주셨다. 그분은 막 학교를 인수하신 상태라, 더 새롭게 발전시키려는 계획과 앞으로의 전망을 쉴 새 없이 설명하셨다. 참으로 능변가였다. 그러나 정작 내가 듣고 싶은 취업 관련 말씀은 한마디도 없었지만, 바로 퇴장시키지 않고 함께 시간을 보낸 걸 보면 면접 결과에 대해 희망적인 느낌이 들었다.
다시 인천으로 되돌아왔다. 학교에 취업할 기회도 쉽게 놓칠 수는 없었다. 첫 면접을 하고 나서 얼마 후에 Y씨에게 전농동 자택으로 찾아뵙겠다고 허락을 구했다. 다시 찾아간 때는 일요일 오전이었다. 그날, 교장 선생님께서 시골아저씨처럼 소탈한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시던 기억이 지금도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아들한테서 소식을 잘 들었다며, 학교를 갓 인수하여 어려움이 많다는 것, 당신께서는 교사생활을 했었고, 문학도이고, 시인이라는 것, 같이 인수하게 된 교보생명 C이사장님과의 관계 등을 대충 말씀해 주셨다.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나를 부르시겠다는 말씀을 끝으로 그날은 그렇게 헤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