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1월 1일. 오성 한의원 원장이 와서 침을 놓았다. 기분이 좋아진 이선은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척추가 삐끗해서 소동이 벌어졌다. 암세포가 이미 척추를 침범한 것이다. X선 사진에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산소호흡을 하고서야 진정되었다. 그리자 주치의 김경식 박사가 나를 불러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며칠 남지 않았으니 퇴원시켜서 그 때를 기다리도록 하시요.”
1월 1일에 우리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통고를 받은 것이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딸들에게는 계속해서 비밀로 해달라고 김 박사에게 부탁하고는 그 길로 집에 와서 전 총무처장관 서일교 씨를 전화로 통하여 순천향병원 내과부장 서석조 박사와 연락이 되었다. 낮에 골프를 치고 돌아와 집에서 쉬고 있던 그 분은 명륜동으로 친히 와서 그간의 경위를 듣고는 내일 오후 1시에 나와 함께 백병원으로 가기로 약속하였다.
1월 2일 오후 1시에 서 박사를 모시고 백병원으로 가 직접 진찰시켰다. 10중 8, 9는 암 같으나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가 없다. 우선 안색이 암 환자와 다르며 그밖에 몇 가지 의문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그는 순천향으로 돌아가 약 9포를 지어 보냈다. 그 약을 먹으니 환자는 대단히 기분이 좋다고 하였다.
1월 3일. 어제 밤에는 진통제 주사를 맞지 않고서도 잠을 잘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척추의 한 마디가 앞으로 꺾이는 것 같다고 호소하였다.
1월 4일. 38도 5분의 높은 열로 고생. 주치의는 암 세포가 확산되었기 때문이라고 걱정하였다.
1월 5일. 10시에 정부의 시무식에 참석하고 12시에 민복기 대법원장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이선이 오후부터는 열이 내리면서 누렇게 물든 땀이 한없이 흘러나와 침구가 망가질 정도였다. 오후 5시에 백병원을 나와 순천향병원 601호로 병실을 옮겼다. 환자는 기분이 좋아졌다.
1월 6일. 오전에 감사원장을 방문하고 오후 4시에는 국무회의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 하루의 심정은 답답하다고 일기에는 기록되어 있다. 최종적으로 한 번 더 X선 사진을 찍어 보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어제 밤에는 편히 잤다고 한다. 식욕이 다소 생겨 수박, 토마토 등 신선한 야채를 자꾸만 찾는다고 한다. 그 당시로서는 이런 것을 겨울에 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전국을 뒤져서 간신히 몇 개를 구해 먹였다.
1월 7일. 간밤에는 잠을 자지 못하였고 전신이 또 다시 아프다고 한다. 점심시간에 법무부 청사를 나와 순천향으로 가서 서석조 박사를 찾았다. 어제 찍은 X선 사진으로 보아 100% 폐암임이 확실하며 백병원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이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하늘이 캄캄하였다. 나의 안색을 보고 딸들이 눈치 챌 것 같아 병실로는 가지 않고 그대로 법무부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남산에 있는 음악당 앞에 차를 세우고 나 혼자 밖으로 나와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담배 2개비를 다 피울 때까지 절망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수행비서 조 군도 침통한 표정이었다. 저녁 퇴근길에 다시 순천향으로 갔다.
1월 8일. 이날 중공의 주은래 수상이 죽었다. 이선은 꿈에 뙤놈이 죽었는데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다.
1월 9일. 백 노인이 낮과 저녁에 두 번 와서 치료해주었다. 그는 어제부터 영채가 소개받아 데려온 기 치료하는 사람인데 환자의 사정을 보아 함부로 내칠 수도 없어 그저 속는 셈 치고 그냥 놔두었다.
1월 10일. 역시 백 노인이 두 번 와서 치료해 주었다. 그런데 이 날부터 환자에게는 통증이 없어졌다. 아픔이 없어지고 부기가 빠지더니 자꾸만 잠을 자는 것이다. 푹 늘어져서 자기만 한다. 그래서 무궁화는 어머니를 잠자는 공주 같다고 하였다. 얼굴이 예뻐졌고 윤기가 되살아났다.
그러나 밤에 영준이가 집으로 와서 백 노인이 사기꾼 같으니 멀리 하라고 간청하였다. 나는 비로소 그에게 어머니의 병명이 폐암이라고 알려 주고는 백 노인이 그런 줄 알고 있으나 어차피 죽을 몸이니 유한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일부러 속아주고 있는 나의 심정을 알아달라고 말하였다. 그 때의 영준의 표정은 내가 김, 서 박사로 부터 통고를 받았을 때의 그것과 같은 것이었다. 아들의 표정을 보니 내 가슴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
1월 11일. 백 노인이 와서 두 번 치료. 통증은 없어졌고 그냥 잠만 잤다. 혓바닥색도 좋아지고 안구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상반신의 부기는 빠졌고 얼굴도 빠지기 시작.
1월 12일. 백 노인의 치료 2번.
1월 13일. 역시 두 차례 치료. 간밤에는 잠 을 자지 못했다고 환자는 말하고 있다. 너무 굶어서 그렇다는 백 노인의 말에 식사를 조금시켰다. 비몽사몽 간에 동자의 모습이 보인다고 야단이었다.
1월 14일. 백 노인 치료 두 차례. 병실의 침대에서는 꿈이 많다고 칭얼거리지만 소파에 앉아서는 숨결이 편안하고 또 잠도 잘 잤다. 여전히 잠자는 공주다.
1월 15일. 백 노인 치료 두 차례.
1월 16일. 헛소리가 여전히 심하였다.
1월 17일. 여전히 헛소리가 심하였다. 정신이 돈 사람 같다는 것이 24시간 계속해서 환자 옆에 붙어있는 무궁화의 말이다. 오늘은 동자 운운의 말은 하지 않았다. 반면에 남편에 대한 걱정이 대단하였다. 밤에 그는 혼자서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고 한다.
‘부처님이시여. 딸 셋을 단념하겠습니다. 그들을 모두 부처님에게 맡기겠습니다.’
이와 같이 딸 셋은 단념 하였으나 남편에 대한 애착과 미련 만은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미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각오하고 있었던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