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황산덕 법철학 내지 법사상을 논하려면 우선 그 구성이 다양하고 심층적이라는 것이 나의 첫인상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서양의 철학과 학문을 민첩하게 수용하여, 막스 베버. 한스 켈젠, 한스 벨첼, 비트겐슈타인, 카르나프 등을 활기차게 소개하였다. 그는 켈젠의 저서들을 번역하고 ‘켈젠니안’으로 자처하시기도 하셨다. 그렇지만 “켈젠을 통해 켈젠 위로”라고 하셨 듯 이러한 서양이론들의 이해와 소개는 깊은 곳에 있는 자신의 (법)철학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1965년에 이미 ‘동양고대의 법사상’이란 장문의 논문을 발표하셨다.
이항녕의 법철학도 그렇지만 경성제대의 오다카 도모오(尾高朝雄)교수에게서 법철학을 배워 잠시 일제관직에도 몸담았지만 해방이 되면서 새로 시작하는 학문을 우리고유의 동양철학으로 기초를 삼고자하셨다. 그래서 소설가 김동리 씨의 형님이며 동양학의 대가인 김범부(金凡夫) 선생을 모시고 건국대학 낙원동 교사 안에 ‘동방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주역(周易)을 비롯한 동양철학의 가르침을 받는 기회를 가졌다.
하나의 큰 돌이 부서져 이루어진 우리 강토의 원류인 그 큰 돌의 한 구석을 맡으라는 뜻의 ‘석우(石隅)’라는 아호도 김범부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여기에서 이항녕의 풍토적 자연법론과 황산덕의 불교적 자연법론이랄까 법도구론(法道具論)이 이미 기초 놓아졌다는 사실은 학술사적으로도 뜻 깊게 생각된다. 서양법철학을 받아들여 그것을 비판적으로 소화하여 자신의 법철학으로 표현한 선배학자들의 지성적 역량과 학문적 열정이 놀랍고 존경스럽다.
V
이 무렵 「서울신문」에 연재 중이던 정비석 씨의 「자유부인」에 대해 황 박사가 「대학신문」에 ‘자유부인 작가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함으로써 작가와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격화되던 논쟁의 불은, 문단의 원로인 백철(白鐵) 선생이 문학 작품의 대중성과 예술성을 논하는, 「문학과 사회와의 관계」라는 글을 발표해 중재함으로써 가라 앉았다. 그 후 정, 황 두 분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고 들었다. 그만큼 두 분이 문화와 학문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지성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석우는 19세 때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예과의 문과 갑류에 4등으로 입학하였다. 이 시절 그는 「공산당선언」을 비롯한 좌익서적을 탐독하여 유물론에 빠져 들었으나 앙드레 지드의 「소련에서 돌아오다」를 읽고 스탈린 치하 소련의 실상을 알고 이데올로기로 포장된 공산주의의 만행에 충격을 받고 좌익사상을 버리게 된다. 지드의 우아한 문장에 매료되어 불문학에 심취하기 시작하였고 유민 홍진기(洪璡基)와 친했다.
금년에 홍진기법률연구재단이 설립되어 그의 생애를 돌아보니 경성제대시절에 유민집에서 하숙하며 밤새워 문학토론을 하였던 사실 뿐만 아니라, 유민은 정치를 하다 형벌을 받고 언론기업을 경영하는 과정에서도 친구인 석우에게 기탄없는 충고를 해주었던 사실이 감동적으로 보인다. 또한 그간 아무도 몰랐지만, 두 분이 서울법대 불교학생회인 룸비니회를 창설하였고, 남몰래 후배 법대생들을 위한 장학금을 지급해왔던 사실도 알게 되었다.
VI
1989년 10월 19일 오후 석우는 시내에 나갔다가 갑자기 현기증을 느껴 쓰러져 타계하셨다. 오전에 유언과 같은 의미심장한 유고를 써두어서 죽음을 예견하신 듯하였다. 사실 나는 이런 얘기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다. 조계사 마당에서 거행된 영결식에는 많은 조객들이 모였다. 대웅전 부처님께 합장하여 머리 숙여 기구하시는 이항녕 선생님의 모습도 보았다. 2년 후배인 동학을 먼저 보내시는 심정이 어떠실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석우는 한 글에서 자신이 불교를 믿게 된 동기를 어린아이였던 둘째 아들과 갓 태어난 셋째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고뇌와 번민이었다고 밝히고, 「리더스 다이제스트」와 기록영화 등에서 어떤 사람의 전생(前生)에 대한 기억이 사실로 확인되었다는 기사와 영상기록을 통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를 간접적으로나마 목도한 것이 불교에 대한 확신을 더욱 깊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고 증언하신 바 있다.
그러나 그의 불교에의 귀의가 체험과 간접경험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그의 불교신앙이 단지 불교에 대한 신비스런 외경이나 단순한 기복적 자세에 그친 것은 아니며, 불교적 지혜가 그의 후기 법철학에 영향을 끼친 것이나 그가 주간지 「대한불교」의 주필을 역임하며 불교와 관련된 많은 칼럼과 논문을 쓴 것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불교에 대한 이해는 학문적 탐구 못지않게 진지하고 깊이 있는 것이었다.
그의 법철학의 진로에도 큰 전환점이 된 것은 불교신앙이었다. 특히 금강경이 깨우치는 가르침은 그의 법철학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전환시켰다. 금강경에 나오는 所謂佛法者 卽非佛法(소위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즉 불법이 아니다)이라는 말이 깨우치는 바에서 그는 우리가 ‘법이란 무엇이다’라고 원리·원칙을 세우려 들면 이미 그가 논하는 법은 실체와는 괴리된 말의 유희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이러한 결론이 얼핏 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로 비칠 수도 있으나 이 결론의 참된 뜻을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법이란 무엇이다 라고 정의를 내리려들면 들수록 자기가 생각하는 언어의 사슬에 얽매여 미혹에 빠질 뿐이며, 법이 추구하는 정의(正義)가 무엇인지는 딱 잘라 말할 수 없지만 구체적 사안이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것은 알 수 있는 만큼, 법의 본질이 무엇이다 라고 정의 내리는 것보다 법이라는 제도를 어떻게 하면 유용하게 운용할 수 있는가라는 실질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것이 그를 법철학자이면서 법행동가로 활동하게 한 근거가 아니였나 생각한다.
VII
나는 교수직 만년에 법대 역사관을 만드는 일에 힘을 써 완성한 후에는 매학기 학생들을 위해 기획전시를 하였다. 그 일환으로 2013년 9월에 <황산덕의 법학세계>라는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유족들의 협조로 석우의 저서판본들은 물론 친필 원고, 사진, 유품 등 다양하게 전시할 수 있었다. 그 때 가장 인상적인 기억은 석우의 글씨가 그렇게 단아한 필체라는 사실이었다. 최초로 내신 <세계사연표>(1948)라는 저서의 원본은 옛날 한서(漢書)를 방불케 하는 큼직한 종이묶음에다 손수 칸을 치시고 깨알 같은 글씨로 쓰셨는데, 나는 무슨 팔만대장경의 축소판을 보는 것 아닌가 감탄하였다. 그 후 이 저서원본을 포함하여 많은 종류를 유족들은 서울대 기록관에 기증하였다. 사실 석우는 서울대와 우여곡절과 아픔도 있었는데, 역시 모교의 기록관에 유품을 맡기게 되셨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일었다. 탄생 100주년을 맞으며 이런 사연의 진행이 새삼 감사하게 회상된다.
나도 법학자로서의 역할에서 정년 후 좀 더 문학과 사상 쪽으로 확대하면서 유진오, 이항녕, 황산덕 같은 선배학자들의 학문적 정신적 지평을 새삼 존경스런 마음으로 회상하게 된다. 나름대로 이런 선배들에 대한 글을 써서 증언으로 남기려했는데, 석우의 경우 불교와 사상에 대한 폭넓고 깊은 정신세계를 미쳐 이해할 수도 없을 정도로 광범하고 깊다. <三玄學>(1978), 나가아르주나(龍樹)의 <中論頌>(1978), 원효의 <열반종의>(1982), <如來藏>(1984), <복귀>(2003), 이런 남기신 동양고전과 정신세계의 해석은 앞으로 두고두고 음미해야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처럼 한국정신과 사상계를 풍부하고 심오하게 비옥화시켜주신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