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날까지 <기적과 환상>을 <새로운 4·19>로 제목을 바꾸어 계속 개정판을 내고 있는데(1997년에 <새로운 4·19> 초판을, 2010년에 4·19혁명 50주년기념 증보판을, 2015년에도 55주년 개정판을 내었다), 그 때마다 석우의 위 <기적과 환상>의 서문을 곰비임비 인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4·19혁명이야말로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초석이요, 그 후에도 6·3운동, 유신반대운동, 부마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석우의 말씀대로라면 이 나라 민족정신의 바탕이자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4·19에 대한 석우의 정신과 사상을 지금도 가슴에 품고 있는데 한때는 석우를 경원하고 미워한 적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1974년 9월 28일부터 1977년 12월 20일까지 법무장관과 문교장관의 재직기간이다. 석우가 동아일보 사설 ‘국민투표는 만능이 아니다’라는 글 때문에 박정희 군부정권으로부터 옥고를 치를 때 나도 군사법정에 방청을 가서 불의에 굽히지 않는 석우의 의연한 모습에 감동하였었는데 어찌하여 쿠데타·유신의 주역인 박정희 밑에 가서 장관직을 수행하느냐는 나 나름의 울분 때문이었다.
더욱이 1960년대 중반 쯤 나는 청와대로부터 대통령 스피치라이터로 오라는 제의를 받은 일이 있었는데(아마도 4·19세대로 <기적과 환상>의 저자이기 때문에 군부가 포섭하려 하였던 것으로 보임), 언론인이셨던 아버지와 함께 단호히 거절한 일이 있었으므로 석우의 입각은 군부정권에 대한 투항과 같은 것으로 생각되어 그 당시 젊은 의기가 넘쳤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후에 석우는 장관직을 맡은 까닭에 대하여 “옥고를 치르면서 완벽한 법제도에도 불구하고 독재가 이루어지는 것은 국가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의 마음가짐과 덕목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회고하였다고 한다. 또한 두 장관 재직 시에 많은 업적을 남기고 모범적인 청백리의 전형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그래도 석우를 미워했던 나로서는 큰 위안이 되었고, 역시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정치현장에서 어느 사람이 일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음)이라는 깨우침을 주었다. 그래서 ‘인간 황산덕’을 미워하지 않게 되고 지금도 추모의 정을 잊을 길이 없는 것이다.
그 후 1989년 10월 19일 갑자기 타계하셨을 때 영정 앞에서 무릎 꿇고 한 때 젊은 나이에 철없이 미워했음을 진심으로 사과했던 것이다. 그 사과의 의미였을지도 모르지만 그 후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제1호로 안장된 후에 부근이 너무 황량하여 당시 지인이 국립묘지소장으로 있어서 부탁하여 묘소 앞 길가에 느티나무를 기념식수 하였는데 지금은 크게 자라서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로 지켜준다고 하니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또한 우리는 같은 불자로서의 인연도 있다. 나는 엉터리 불자지만, 석우와 대법선(大法船) 황이선 사모님, 두 어른은 불자라도 보통 불자가 아니다. 대법선은 동국대학에서 따로 불교공부를 할 정도로 학구열이 대단하셨고, 또한 ‘실천하는 불성(佛性)’이라 할까 여성신도로서 불교정화에도 앞장 설 정도로 행동하는 지성이었다.
특히 석우는 법철학·국제사법·형법 등 법률서적 이외에도 이 나라 젊은이들의 교양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복귀>(1975년)를 출간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에 관한 책자도 많이 저술하셨다. 동국대학교 <불교>(1967년) 교과서를 비롯하여 <용수보살의 중론송>(1976년), <삼현학>(1978년), <여래장>(1980년), <원효의 열반종요>(1982년)를 저술하여 불교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이 책들 가운데 나는 특별히 <복귀>와 <여래장>에 심취했었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아무리 천재적 두뇌를 가진 석우라 하더라도 어떻게 이러한 훌륭한 책들을 저술할 수 있었는지 존경을 넘어 머리 숙여 감탄할 뿐이다.
불교와 관련해서는 석우는 너무나 큰일을 두 번 이루어냈다. 하나는 법무장관 재직 시에 국무회의에서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처님 오신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는데 앞장섰고, 다른 하나는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직을 맡아 ‘불교방송’을 개원하는 토대를 마련한 점이다. 그 뒤를 이어 무애 서돈각 교수가 이사장직을 맡았을 때 나는 함께 같은 헬스클럽에 다니며 가르침을 받아 서울법대의 은사 두 분으로부터 불교영향을 받은 것을 지금까지 행운으로 여기고 있다.
또한 석우의 자손들이 석우와 대법선을 닮아 불자로써 각계에서 활동하고 있어서 같은 도반인 나로서는 무척 반갑기 그지없다.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가슴이 미어지는 대목에 목이 메었다. 대법선이 임종할 때 딸들이 모여 아미타경에 따라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염불을 흐트러짐이 없이 한 마음으로 염송하는 모습이었다. 보통 임종 시에 딸들은 대성통곡으로 울며불며 할 텐데 그들은 오로지 지극정성의 염불로 임종을 맞았으니 그들의 불심(佛心)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더욱 감동적인 일은 당시 큰 딸은 결혼했으나 나머지 세 딸들은 장성하여 미혼이었는데 아버지가 재혼하지 않는 한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아버지를 재혼시킨 후에야 무궁화, 남채, 옥채가 차례차례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 가운데 판화가인 남채, 그 부군 유영 박사와는 재가불교단체인 ‘우리는 선우’에서 함께 법문을 듣고 실크로드 여행도 따라간 교우(敎友)이다.
특히 큰 영애이자 학우인 황영채 박사는 <아는 마음, 모르는 마음-어느 법학자의 위빠사나 수행기>(2005년)를 펴내고 선원에서 수행자들을 지도할 정도로 불심이 대단하여 불교학식과 수행에 남다른 경지를 걷고 있다. 게다가 그의 큰 딸 김봉이는 ‘우 쿤달라 비왐사’의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 요인>(2009년)을 번역(묘원 주해)했고, 작은 딸 김경화도 마하시 시리즈 1권 ‘마하시 아가 마하빤디따’의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위빠사나 수행>(2009년)을 번역하였으니 3대에 걸쳐 불교수행에 대를 잇고 있어 불교집안으로서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
이 책 <석우 회고록>은 타계 2년 전에 마치신 글로 애초에 외부에 발표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 자손들에게만 전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기회는 영원히 없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석우의 뜻을 거슬러 외부에 책으로 발간하기는 여간 쉽지 않은 일인데도 그 내용이 자손들만 보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석우 탄신 100주년을 맞이하여 펴낸 것으로 안다. 이를 주관한 황영준 회장의 깊은 뜻과 가슴 뜨거운 효심에 경의를 표한다. 황 회장은 물론이고 아들과 딸, 며느리와 사위가 모두 독실한 불자이다.
참으로 할 말은 태산 같으나(?) 지면관계로 여기서 줄여야겠다. 결국 석우의 인생은 ‘법과 사회와 국가를 위한 삶’이었다는 평가 이외에는 다른 해석이 없을 것 같다.
석우가 영면하기 네 시간 전에 그의 죽음을 예견한 듯 마지막 남기신 게송(偈頌)의 일부를 옮기면서 존경하고 사숙하는 석우의 극락왕생을 빌어마지 않는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남에게 보이기 위해 죽는 것은 아니다....나는 그저 죽는 것이다.....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죽어 없어진다. 그리고 그 죽은 사람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그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알 바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