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청송 심씨, 1864~1945)는 성격이 매우 대범하시었다. 다정다감한 할아버지에 비해 할머니는 이를테면 직선적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동으로 가자고 하시면 할머니는 으례 서로 가자고 하셨다. 한물 간 생선을 사왔다고 할아버지가 야단을 치시면 난 맛이 있구만이라고 하면서 상대도 하지 않으시었다. 자그마한 일까지 간섭하시는 것에 대해 할머니께서는 못 마땅하게 여기셨던 것 같다. 그래서 두 분 사이에는 항상 말다툼이 있었고, 할 수 없이 할아버지는 아버님이, 그리고 할머니는 작은 아버님(황용환)이 모시고 살았다.
할아버지가 69세 때에 큰 병으로 돌아가실 뻔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에 자식들의 권유로 두 분은 비로소 화해하셨는데, 그 후 십년 동안 두 분은 만나면 서로 인사는 나누었으나 여전히 별거 아닌 별거생활을 계속하셨다. 두 분은 이렇게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중년 때부터 별거생활을 해왔으나, 그러면서도 할아버지는 소실을 두지 않으시었다. 본처 외에 작은 집을 두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가문의 전통이 되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할아버지가 숨을 거두시자, 제일 큰 목소리로 곡하신 분은 역시 할머니였다. 서로 사이는 좋지 않으셨지만 그러나 가슴 속 깊이에는 애정과 존경심이 있었던 것이다.
1899년(할아버지 39세, 할머니 37세)은 두 분에게 있어서 흉한 한 해였다. 평양사람들은 옛날부터 석투(돌싸움)를 좋아하여 지방관의 임석 하에 시민들을 두 편으로 갈라놓고 석전을 벌이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 이 해에도 1월14일에 평양에서 석전이 벌어졌고 할아버지는 석전 구경을 가셨다. 그런데 갑자기 큰 돌이 날아와 할아버지의 왼쪽 눈에 맞았고, 그 때문에 이 부터 할아버지는 심한 부상으로 거의 좌안실명이 되고 말았다.
또 그해의 봄에 둘째 아들 정환이 요절하였는데 할머니는 아들의 무덤에 가서 얼마나 슬피 울었는지, 4월 8일에는 오른쪽 눈에 이물질이 들어가 결국 오른쪽 눈을 거의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같은 해에 두 분께서 모두 이와 같이 한쪽 눈에 부상을 입게 되니 어찌 이것을 큰 재앙이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두 분의 손자로 태어났을 때에는 이미 두 분은 모두 한쪽 눈에 장애가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4남 5녀를 낳으셨지만 장성한 자식은 3남 2녀뿐이었다.
― (3녀) 국수녀
1885년 10월 20일생. 조 씨에게 출가하여 원산에서 살다가 신의주로 이사를 가서 살았다. 참으로 부덕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분이었다. 때때로 평양을 다녀가셨는데, 내가 결혼을 하였으나 나의 부모님이 우리 부부에게 옳지 않게 대해 주는 것을 보고 상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개탄하면서 다시는 평양에 오지 않으셨다.
우리들은 그 분을 신의주 큰 고모님이라고 불렀다. 해방 전에 돌아가시었다.
― (장남) 명환
1888년 11월 20일 생. 평생 일하지 않고 놀면서 사신 분이었다. 젊었을 때에는 술과 난봉으로 세월을 보냈고 늙어서 13년 아래인 한씨와 결혼하여 1남 (봉덕)을 두었다. 봉덕은 일본 언근고등상업학교를 나와 한때 중국 상해에서 살았으나 해방이 되자 서울로 와서 우리 집에 있으면서 결혼도 하였고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였다. 그런데 6.25 사변 당시 평양이 수복되자 부모님을 서울로 모셔오기 위하여 부부 동반으로 평양으로 갔다가, 1.4 후퇴 때 대동교가 끊어졌기 때문에 남하하지 못하였다. 생사를 알 수가 없다.
― (3남) 경환 (나의 아버님)
― (5녀) 금주
1901년 6월 5일생. 성격이 명랑하고 부드러웠으며, 평양에서도 손꼽히는 미인이었다. 전내점과 결혼하여 3남 3녀를 낳았으나 옹졸한 전씨와 오래 살 수 없어 이혼하였으며, 1.4후퇴 당시에 3남 2녀를 거느리고 남하하여 지금(1986년 현재)은 부산에 계신다.
장녀 경록 황병훈과 결혼하여 지금 부산 부근에서 살고 있다.
2녀 화록 해방 후 공산당이 되어 남하하지 않았다.
장남 세록 남하하여 극장을 경영하다가 불량배에게 살해되었다.
차남 국록 다리 장애가 있다. 활동력이 있어 장사를 하였으나 병사함.
3남 명록 고모님을 모시고 지금 부산에서 살고 있다.
3녀 미록 출가해서 잘 살고 있다.
― (4남) 용환
1903년 10월 4일생. 해방 전에는 선친 밑에서 고무공장 경영을 도왔고, 해방 후에는 평양에서 신문사 주필을 하였으며, 1.4 후퇴 시에는 남하하여 부산에서 일하다가 논산으로 옮기신 후에 그 곳에서 돌아가시었다. 미남자였고 여자들이 많이 따랐다.
장남 민세 어려서 죽었다.
차남 민우 해방후 남하하여 우리 집에서 살았으나 6.25때 인민군에 끌려간 후에는 소식이 없다.
3남 민갑 6.25때 인민군으로 출전하여 낙동강 전투에서 이탈하여 남쪽으로 도망 왔으며 부모를 모시고 살다가 지금은 부천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장녀 재복 해방 후에 남하하여 우리 집에서 살면서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결혼 후 남편과 함께 캐나다에 이민 가서 살고 있다. 3년 전 다녀갔다.
해방을 전후하여 할머니는 금주 고모님의 식구들과 함께 평양 근교의 사동에서 사셨다. 1945년 12월 11일에 저녁을 잡수시고 애들과 함께 화투놀이를 하다가 밤 9시 쯤 나는 그만 하겠다라고 말씀하시고 돌아 누우셨는데, 얼마 후에 애들이 다시 보니 돌아가시었다고 한다. 83세. 그리고 할머니의 여동생은 안 씨 집에 출가하여 아들을 낳으셨는데, 이분이 바로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