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으로 이사를 오신 어머니는 암정이라는 곳에 있는 평양 감옥에 나를 데리고 가서 선친을 만나 뵙고 오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선친은 그 곳에서 취사당번을 했기 때문에 감옥 생활은 그런 대로 편했다고 한다. 물론 식사는 콩밥에 채소국이지만 하루는 일본의 황태자 유인의 결혼을 축하한다고 쇠고기국이 나왔다. 쇠고기를 삶아서 잘게 썰어 직접 손으로 국그릇 마다 한 조각씩 넣는 동안에 선친께서는 무의식 중에 큰 고기 덩어리 하나를 자기 입에 넣으셨다. 물론 그것 때문에 말썽이 생긴 것은 아니고 그대로 넘어갔지만, 그러나 선친께서는 이 일로 평생을 두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셨다고 한다.
선친의 형기는 1년 6월이었지만 유인(일왕 히로히또)의 결혼기념 특사로 2개월 단축되어 출감하시었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는 일본인 상점인 신호상회에 취직하셨지만 사상범 전과자라고 해서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하였고, 그 후 얼마 동안 실직상태로 계셨다. 그 동안에 선친께서는 지방에서 열리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등짐장사도 하시었다. 이렇게 고생 하시면서도 아버님은 나를 이문리 교회의 유치원에 보냈고 그리고 어머님은 딸을 낳으셨다.
이 때에 태어난 누이 동생의 이름을 할머니는 복녀라고 지어주셨다. 너의 오라버니 산덕이가 너희들이 가지고 태어날 정기를 모두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산영이는 일찍 죽었고 너는 또 불구자가 되었구나. 너희들이 이렇게 불쌍하게 태어난 대신에 너의 오라버니 산덕이는 이 집안을 크게 빛낼 사람이 될 것이니 너에게는 참으로 안됐지만 너의 이름을 복녀라고 지어야겠다고 하셨다. 복녀의 두 다리는 뻗어 있어서 굽히지 못하였고 두 팔은 오그라져 있었으며 정신도 또한 백치 상태였다. 밥을 먹여 주어야 하고 대소변도 어머니가 기저귀를 갈아주어야 할 만큼 힘들었던 것이다.
17세가 되자 복녀는 죽었다.
어머님은 계속해서 또 딸을 낳으셨는데(1921년) 이 아이가 재숙이었다. 그리고 26세 때 선친은 김동원씨(나중에 대한민국 국회의 초대 부의장이 됨)가 경영하는 <평안고무공업사>에 취직하셨다. 그리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선친은 해방 될 때까지 고무신 제조업에 종사하셨다.
동시에 이 무렵에 우리 식구는 평양의 상수구리 77번지로 이사하였고 또한 나는 광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22년의 5세 때의 일이다. 상수구리 77번지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 전국에 유행성 뇌막염이 유행하여 평양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죽어 갔다. 관청에서는 환자를 찾아내어 격리수용하였고 죽은 사람은 공동묘지에 버렸는데 시체를 메고 가던 인부들이 공동묘지까지 가지 않고 도중에 서 버렸기 때문에 시내와 교외에는 송장이 산더미 같이 쌓일 정도였다.
그런데 선친께서 바로 이 무서운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래서 언제 끌려 나가 격리 수용 될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하루는 내가 문 밖에 나가 망을 보고 있는데 부청 사람들이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 고함을 질렀고 큰 아버님이 선친을 업고 집 뒤로 돌아가 숨었다. 드디어 사람들이 들어 닥치고 어머니는 눈물로 부엌에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시늉을 하고 계셨다. 이 집에 환자가 없냐는 질문에 없다고 시침을 떼면서 말로 잘 둘러대서 그들을 다 돌려보냈다.
나는 그길로 집 뒤로 돌아가 이 사실을 알려드렸고 큰 아버님께 업힌 선친은 물론 의식이 없고 다리도 떨고 계셨다. 그날 이후 선친은 기독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고 얼마 후에 병이 완쾌되어 퇴원하셨다. 배를 사가지고 병문안 갔던 생각이 난다. 비로소 기억을 다시 찾으신 선친은 모두들 고생이 많았다고 고마워하시었다. 그 후에 선친의 뇌 활동은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았지만 다만 수학적 두뇌만은 다소 지장이 생긴 것 같다고 말씀하시었다.
6년 전 양덕에 있는 산에 올라가 하나님에게 기도를 한 이후부터 이날에 이르기까지 선친의 생활은 고난과 비참의 연속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약간의 저축이 생겨 창전리 50번지로 이사를 갔고 이후부터는 선친의 생활은 상승일로로 뒤바뀌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선친은 무종교인이 되셨다. 본래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처가 때문에 하나님을 부르게 되었던 것인데 아주 정이 떨어지신 모양이다. 돌아가실 때까지 어떠한 종교도 가진 적이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반종교는 아니었으며 이를테면 탈 종교적 인도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활신조로 일관하시었다.
1927년(선친 31세)에 돈에 좀 여유가 생기어 우리는 상수구리 130번지로 이사를 갔다. 이때의 식구는 할아버지, 부모님, 복녀, 재숙, 인(1925년), 원(1926년)의 8명이었다. 이 집이 우리의 원적이며 여기에서 재옥(1928년), 재순(1930년), 돈(1932년), 재연(1935년)이 출생하였다. 그리고 할아버지도 이 집에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에 건(1939년)이가 출생하였으나 이때 우리 식구는 이 집에서 살지 않았다. 어머니의 신경성 질환으로 우리는 이 집을 작은 아버님께 맡기고 신양리, 기림리 등지로 옮겨 다녔는데, 1.4후퇴 때에 작은 아버님은 이 집을 버리고 남하하였다. 그러나 이집은 아직까지 남아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집안의 정신적 고향이 되어 있다.
이 집에 있는 동안에 선친은 김동원 씨와 손을 끊으셨다. 김동원씨는 작가 김동인의 친 형으로 많은 유산 때문에 큰 부자가 되어 있었고 또 기독교에 깊이 관계하여 사람들은 그를 김장로라고 불렀는데 결백하고 정직한 선친의 성격과는 잘 맞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젊은 부자 박승엽씨가 선친과 손을 잡자고 제안 해왔다.
이리하여 선친은 박씨가 상속으로 물려받은 세창고무공업사의 공동 경영주가 되셨다. 다 쓰러져가는 공장을 재건시키기 위해서였는데 선친께서는 미국의 테일러(Taylor)의 행정학이론을 도입하여 기업경영을 합리화 하였으므로 이 공장은 순식간에 크게 발전하여 서울의 대륙고무공업사 다음으로 전국에서 둘째가는 큰 공장이 되었고 나중에는 만주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중국여인의 발에 맞는 특이한 모양의 고무신을 만들어 팔아 많은 돈을 번 것이다.
이때부터 30여년이 지나서야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의 행정학을 도입하여 연구하게 되었는데 이 점에서 본다면 선친은 행정학을 직접 도입하여 실천에 옮긴 선구자라 말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