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은 어려서 부터 매우 총명하시었다. 일본 사람들이 만수대 밑에 평양고등학교를 세우고는 거리에서 북을 치고 다니면서 학생 모집에 열을 올렸지만 할아버지는 자식들이 학교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당시의 어른들은 모두 그랬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친께서는 몰래 학교에 가서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신학문을 배우는 것을 그처럼 반대하신 할아버지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계셨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는 선친께 수학에 관한 문제를 내시었다. 소위 학구산(鶴龜算)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학과 거북의 다리의 수는 얼마이고 머리의 수는 얼마이니 각각 몇 마리씩인가를 묻는 식의 문제였다. 이것은 할아버지가 매우 자랑하시는 수학 문제였다고 한다.
그런데 선친은 학교에서 배운 대수를 이용하여 즉석에서 그 해답을 풀으셨다. 그랬더니 할아버지께서는 깜짝 놀라시며 어디서 그런 것을 다 배웠냐고 물으셨다. 선친께서는 사실대로 고백하고 할아버지께서는 학교가 그런 것을 가르치는 곳인 줄은 몰랐다며 앞으로 학교 다니는 것을 허락한다고 말씀하시었다. 이것은 한일합방 직전에 있은 일이다.
선친은 영어에 특히 흥미가 있어 일본에서 발행되는 와세다 대학 강의록을 주문해서 공부하셨다고 한다, 이리하여 영어에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자 하루는 지나가는 미국인 선교사를 붙들고 영어로 말을 건네 보았다. 그랬더니 그 미국 사람이 하는 말이 뜻밖이었다. 당신이 하는 조선말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고 그도 그럴 것이 일본어로 된 영어강의록에 기록된 발음은 모두 일본 글자로 표시되어 있어서, 가령 ʻThat is a bookʼ은 ʻ자또 이즈 아 북구ʼ로 되어 있어 이런 식의 발음은 미국 사람이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선친은 영어 공부를 단념하셨다고 한다.
평양고등학교는 4년제였으므으로 선친께서는 16세의 어린 나이로 그 학교를 졸업하시었다. 선친은 학문을 좋아하시여 평생 손에서 책을 떼지 않으셨지만, 그 분의 학교 공부는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는 곧 금융조합(지금의 농협)의 입사시험에 합격하시여 평안남도 양덕에 있는 금융조합의 서기가 되어 단신 부임하시었다.
그 때에 일본인 시험관이 혼자서 임지로 떠나는 것이 기특해서 엄마 젖이 먹고 싶어서 어떻하냐고 농담을 걸어올 정도로 선친은 매우 어려 보였다고 한다.
양덕에서는 하숙생활을 하면서 배정일목사가 세운 교회에 자주 나가시었다. 하루는 배목사가 선친을 불러내서 ʻ자네 내 딸과 결혼하지 않겠는가ʼ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선친께서는 그 자리에서 그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라고만 대답하시었다. 그리고는 여러 날이 지나갔다. 배 목사는 젊은 사람이 하도 마음에 들어 말을 한 것인데 내가 주책을 부려 큰 망신을 했다라고 단념하고 계실 무렵 선친께서 교회를 찾아가 결혼을 하겠다고 대답하시었다.
배 목사는 한편 마음이 놓이면서도 왜 그렇게 늦게 대답을 했냐고 물으니 평양에 계시는 부모님께 편지로 알려드리고 허락을 받아야 하므로 늦었다고 대답하셨다고 한다. 이리하여 1916년에 아버님과 결혼하신 분이 바로 나의 어머니다. 당시에 두분은 모두 20세의 꽃다운 나이었다.
배정일목사와 부인 김 씨 사이에는 1녀 4남이 있었다. 장녀는 나의 어머니(배현도)였고 다음에는 선호, 주일, 선영, 선만의 4남이 있었다. 외삼촌 선호는 배 목사가 충북 제천에 교회를 설립하실 때에 그 곳의 지 씨 성의 딸과 결혼하여 평양에서 살았고 (해방이후 1.4후퇴 당시까지 생존), 동생 선영은 아편으로 죽었고, 선만삼촌은 1.4 후퇴 때 남하하여 부산과 서울의 관철동에서 장사를 하다가 몇 년 전에 돌아 가셨다. 외할머니 김 씨는 해방 전에 돌아가셨고, 외할아버지 배 목사는 6.25때에 국군이 평양에 들어간 직후에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처녀 때에 서울로 올라와 이화학당에서 공부하시었다. 자유당 시절 이대총장을 지낸 김활란여사가 1년 후배였다고 하는데 병으로 동대문 병원에 오랜동안 입원하시는 등 별로 공부에 정진하지 못하고 있던 때에 선친과 결혼하여 학교를 중단하셨다.
어머니는 결혼 다음해인 1917년에 나를 낳으셨고, 또 그 다음 해에는 동생인 산영을 낳으셨다. 객지에서 결혼하여 아들을 둘씩이나 두게 되었고 또 돈도 어지간히 저축하여 생활에 여유가 생기게 되었으니 선친의 기쁨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리하여 하루는 선친께서 산에 올라가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렸는데 이에 대해 선친께서는 나중에 많이 후회하셨다고 한다. 그때 선친은 너무나 행복한 나머지 ʻ이렇게 편안한 생활만을 하면 안 되겠으니 저에게 시련과 고난을 주십시오ʼ 라고 기도하셨다는데 그 후 동생 산영이는 홍역으로 죽었고 정말로 계속해서 고난이 밀어 닥쳤다.
그리고 얼마 후 선친은 평남 성천의 금융조합 이사로 승진하시었다. 성천은 평양과 양덕의 중간에 있는 큰 읍이다. 어머니는 이사 준비로 아직 양덕에 계셨는데 그 사이 선친은 1919년에 있은 3.1만세 사건에 연루되어 평양 감옥에 수감 되셨다.
성주에 있는 이윤영목사 (나중에 대한 민국정부의 장관, 국무총리 서리를 지내신 분)와 선친이 주동해서 사전 준비를 하던 중 체포되어 이 목사는 2년, 선친은 1년 6개월의 징역선고를 받고 감옥 생활을 시작하시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로 어머니와 나는 성천에는 들르지도 못하고 곧장 평양으로 가서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대성학교 자리 앞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서 살게 되었다. 이리하여 3살부터 나는 평양 사람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