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기림리에 있는 집에서 독서로 나날을 보냈다. 아침에 선친이 회사에 나가시면서 우리 방에 들러 경자를 한번 안아 보고는 5원을 주시고 출근하셨다. 그러면 그 돈으로 우리는 시내에 나가 영화구경을 하고(입장료 40전) 점심을 사먹고(냉면 한 그릇‐20전), 책방에 들려 책을 사든가 또는 처가에 들렸다가 돌아오는 것이 일과였다. 처가의 살림은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때때로 10원정도의 돈을 놓고 왔다. 물론 내가 그 집에 가면 칙사 대접을 받았다.
이때 내가 주로 공부한 것은 경제학이었는데 마르크스 경제학 대신에 새로 나온 수리 경제학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이리하여 새로 나온 신경제학전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읽었다. 그리고는 때때로 평양 북쪽에 있는 평안수리조합 연못에 가서 낚시질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평양 시청에서 나에게 징용영장이 나왔다. 남태평양의 과달카날(Guadalcanal)에 있는 군부대의 노무원으로 가서 일하라는 것이다. 당시 나는 무직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영장이 발부된 것인데 나는 시청에 아는 사람을 찾아가 교섭 끝에 다음에 또 영장이 나오면 반드시 간다는 조건으로 우선 면제되었다.
이 일이 생긴 다음 나는 책을 싸들고 혼자서 동경으로 갔다. 그리고는 신바시역 앞에 새로 지은 제일호텔에 들었다. 이 건물은 일본에서 제국호텔 다음 가는 호화스러운 호텔이었는데 여기에서 나는 고등시험 준비를 하였다. 약 2개월가량 공부를 하고 나는 그 시험의 행정과와 사법과를 다 치르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7월이 되자 동경에서 합격통지가 왔다. 나는 즉시 동경으로 가서 면접시험에 응하였다. 그런데 국사인 일본사 과목에서 문제가 생겼다. 동경제국대학의 나까무라 교수(일본 황국사관의 대가)가 일본 고대신화에 나오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물었는데 일본인이 아닌 나로서는 이러한 민속설화를 잘 알 수가 없었다. 한참 쩔쩔 매다가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적어도 고등시험의 국사 쯤 되면 정치사나 사회경제사에 관한 것을 물을 줄 알고 공부해 왔는데 소학생이나 배우는 민속설화 따위를 물을 줄은 몰랐읍니다.”
그러니까 나까무라 교수가 소리를 지르며 “말씨를 들으니 너는 조선 사람인데 네가 고문에 합격하여 무지몽매한 너의 백성을 지도하려고 할 텐데 우리 황실에 관한 것도 모르고서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하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년에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는 방을 나와 버렸다.
결국 낙방이 되었지만 필기시험에 합격한 것은 2년간 효력이 있으므로 다음 해에 다시 면접시험에 도전하면 된다. 그러나 하여튼 나는 실의에 찬 심정으로 평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오니 이번에는 이선이가 자리에 누워있고 모두들 나를 경계하고 있는 눈치였다. 내가 고문시험에 낙방한 것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사건이 그동안 집에서 일어난 모양이다. 즉, 이선이가 해산을 위해 산부인과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어머니와 동생 재숙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선이는 큰 충격을 받았고 그로 인해 진통 전 까지만 해도 살아있던 태아가 낳고 보니 질식사해 버린 것이다.
쓸데없는 말로 산모를 자극하여 사고를 낸 어머니와 재숙은 가책을 느끼고 있었고 멀쩡하게 잘생긴 아들을 놓쳐 버린 이선이는 원통해 하고 있었다. 이런 판국에 내가 낙방의 소식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워낙 어른들께서 일처리를 잘못하셨기 때문에 내가 낙방한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고 그때부터 선친께서는 출근하실 때마다 용돈을 매일 10원씩으로 올려 주셨다.
가을이 되자 우리는 금강산을 구경하러 갔다. 1942년 10월 1일에 경자를 데리고 서평양역을 떠나 기차로 원산으로 갔다가 다시 동해안으로 내려가 외금강 역에서 내려 여관에 들었다. 다음날은 만물상과 해금강을 돌아보고 그 다음 비로봉을 향해 떠났다. 정상까지는 40리 거리라 인부 한 사람을 10원에 채용하여 데리고 떠났는데 신계사와 구룡연을 거쳐 정상에 오르니 오후 4시경이 되었다. 비로봉 정상 조금 못 미쳐 마의태자가 탔다는 전설이 있는 말 모양의 바위 옆에 있는 구메산장에 묵기로 했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미 경성중학교의 일본인 학생들이 수학여행 와서 꽉 차있었고 우리들에게는 부엌밖에 잘 데가 없다는 것이다.
나의 귀한 식구들을 부엌에서 재운다는 것은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냥 내금강으로 가자며 소리 지르고는 걸음을 재촉하여 내려갔다. 오는 도중에 비도 맞았고 또 캄캄한 밤길이라 여러 번 넘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부의 길 안내 덕에 큰 위험 없이 밤 10시가 다 되어서 내금강에 도착하였다. 애기를 업고서 산길 80리를 단숨에 달린 것이다.
장안사 옆에 있는 여관에 방을 얻어 목욕을 하고 자리에 누었는데 다리가 쑤시고 아픈데다가 온돌방이 너무 뜨거워 잠을 잘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아픈 다리를 이끌고 여관을 나와 철원으로 가는 기동차를 타고 나중에 한국군과 중공군의 격전지가 된 금성과 금화를 지나 철원을 거쳐 오후 늦게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이선과 경자를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 태워 보내고 나는 서울에 남아 친구들과 며칠 동안 지내고 갔다.
그 후 평양에서의 나의 생활은 여전히 경제학 책을 읽고 때때로 낚시질이나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1943년 여름에 나는 다시 일본으로 갔다. 일본사 공부는 중학생용 참고서를 암기하는 것으로 충분하였으므로 나는 힘 안들이고 일본정부가 실시하는 최고의 국가시험인 고등시험의 행정과와 사법과 양과에 합격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해(소화 18년)의 7월 달 관보로도 발표되었다.
당시의 고문패스라면 옛날 우리나라의 과거 급제에 맞먹는 영광이었다. 그런데 면접시험을 치르기 위하여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이선이가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순산하였다. 이 애가 바로 영준인데, 제일이라는 뜻에서 처음에는 일(一)이라고 이름 지었다. 첫 손자를 보신 선친의 기쁨은 대단한 것이었고 처음으로 집안 분위기가 화기가 감돌았으며 이런 상태에서 나는 동경으로 가서 고문에 합격하고 돌아온 것이다. 황일이 때문에 애비가 과거에 급제했다 라고 모두들 좋아하였다.
이런 가운데 하루는 평양헌병대에서 사람이 찾아와 동경 헌병사령부에서 보내온 입대원서를 내주면서 헌병이 되는 절차를 밟으라고 하였다. 나는 눈앞이 캄캄했으나 이내 결심을 하고 그것을 거절하였다. 그 헌병은 나를 겁박하였다.
“당신이 헌병이 되면 곧 바로 헌병 중위가 되어 만주나 동남아로 배치됩니다. 나 같은 사람은 백번 죽어도 그렇게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것이 싫다고 하니 혹시 황군에 대한 반감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나는 내가 문약하고 소질이 없어 군인은 적격이 아니라고 하며 간신히 그 강요를 물리칠 수 있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 무렵 박정희, 백선엽 같은 사람들이 모두 만주에서 헌병 중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파란만장하였던 나의 학교생활은 끝이 났다. 신동 소리를 들었던 고등보통학교 시절과 대학예과 다닐 무렵의 좌익 편향 그리고 환상속의 문학광등 철없던 시절을 거쳐 여자에 빠져 있던 대학 생활은 마치 드라마와도 같은 삶이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간신히 고문에 합격하였기 때문에 그 후에 다가올 나의 평생 동안의 활동기반은 닦아 놓은 것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