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예과를 수료할 무렵 나는 청량리에 있는 홍진기의 집에서 하숙하고 있었다. 1년 선배인 홍군은 이미 학부로 올라가 법학과에 재학하고 있었는데 이어서 나도 법학과로 간 것이다. 이 하숙집에는 홍군과 같은 반인 계창업(변호사), 철학과로 간 김봉관 군 그리고 1년 후배인 이승열(납북 됨)군도 같이 있었다.
김 군은 법률학과 입학시험에 떨어져 철학과로 가서 미학전공을 하게 되었다. 이 미학은 본래 내가 하려던 학문이었다. 비록 법률학과로 가기는 하였으나 나는 이 학문이 싫었다. 경찰서에 잡혀간 사람과 같은 심정으로 강의를 들었고 또 시험도 치렀다. 그리고 나는 다시 청량리에 있는 홍군의 집을 나와 서대문에 있는 도요다 아파트에 방을 얻어 자취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매일과 같이 명동으로 나아가 이리저리 방황하며 살았다.
이렇게 한 학기를 보내고 여름이 되자 나는 평양으로 가지 않고 경주로 여행을 떠나 처음 보는 신라 고도를 보며 나름대로 감흥을 느꼈다.
가을이 되어 다시 상경하여 주로 명동에서 즐기며 살았다. 엘리자라는 다방에 자주 출입하였는데 거기에서 나는 한 여자를 만났다. 몇 번 그를 만난 나는 그녀에게 영화 구경을 가자고 권유해 보았다. 무도회의 수첩이라는 프랑스 영화였는데 그녀는 나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그리고는 얼마가 지난 늦은 가을의 어느 날 나는 초동에 있는 약초 극장(지금의 스카라극장)에 갔다. 오적홍이라는 일본 영화를 한참 보다가 옆을 보니 거기에 바로 엘리자에서 만났던 그 여자가 앉아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나는 자기 소개를 하였는데 그녀도 나에게 자기 이름을 써주었다. 황이선이라고 한문 초서로 써주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읽는가 물었더니 다시 정자로 써 주었다. 영화이름 오적홍(吾赤黃)대로 나도 황(와레모고오)이구만 이라고 농담을 하고는 서로 웃었다. (紅과 黃은 일본 발음으로 모두 고오다.)
영화가 끝나고 둘은 함께 나와 간단한 식사를 한 다음에 꿈같은 데이트를 하였다. 그 후부터 모든 것이 아주 급속도로 진행되어 우리는 결혼까지 약속하게 되었다. 몇 년 전에 그녀가 평양에서 어머니의 약을 구하러 병원에 갔다가 그곳에서 우연히 그 병원에 온 예과생도인 나를 인상 깊게 본 일이 있었으므로 그녀는 내가 초면이 아니라는 말도 하였다.
이리하여 도요다 아파트 319호실에서 우리 두 사람은 사실상의 부부생활에 들어갔다. 얼마 후에 평양여고에 다니던 동생 재숙이가 와서 우리들과 며칠 동안 함께 지내다 갔고 다음에는 작은 숙부님(황용환)께서 올라 오셔서 화신백화점 4층에 있는 식당으로 이선이를 불러내 만나 보시고는 모두 합격이라는 판정을 내리고 곧 선친께 보고 드렸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선친께서 직접 오셨다. 저녁에 낙원동에 있는 선친의 단골 여관으로 찾아가 인사를 드렸고 다 같이 소공동에 있는 금곡원(중국음식점)으로 갔다. 선친께서는 기분이 좋으셨는지 손에 동전을 한줌 꺼내 들고는 시골부자가 왔다라고 소리치시며 길거리에 있는 거지들에게 돈을 막 뿌리셨다. 이렇게 선친의 결혼 승낙까지 얻어 냈다.
그리고 1년 가량이 지나갔지만 나는 학교 공부는 거의 하지 않고 그저 신혼생활에 도취하여 정신없이 날을 보냈다. 대학에 가서 강의를 듣는 것 보다 아파트에서 이선이와 같이 있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법학공부에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러면서도 그럭저럭 대학 2학년 과정을 마치고 보니 대학 졸업에 필요한 학점은 다 따버리고 이제 더 들어야 할 과목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3학년이 되자 나는 동경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고 선친께 말씀드렸다. 그러자 선친께서 기분 좋게 허락하시면서 이선이도 데리고 함께 일본으로 가도 좋다고 하시었다. 이선이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겨울 방학이 되어 우리는 평양으로 내려갔고 그리고 처가도 방문 하였다. 고철상을 하시던 장인(황학표)과 항상 병석에 누워 계시던 장모(장확실) 그리고 처남인 기봉(基鳳), 세봉(世鳳)과, 처제인 이심(利甚), 이화(利華), 이옥(利玉)도 만났다.
당시에 보통학교를 다니던 세봉과 이화가 나의 귀여움을 받았다. 봄이 되어 평양을 떠난 우리들은 경성역에서 내린 다음 나는 대학등록금 60원을 냈다. 그 동안에 이선은 명동에 가서 처음으로 파마넨트 머리를 하고는 다시 만나 기차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 동시에 평양에서는 선친께서 우리 두 사람의 혼인 신고를 하셨다.
동경에는 이미 외삼촌(배선만)이 먼저 와서 심천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동경에 내린 우리는 그의 안내로 근교에 있는 미까미 아파트 2층 방을 하나 얻어 살림을 차렸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서 멀지 않은 동경제국대학에 가서 오노교수의 형법, 다나까 교수의 상법, 가네꼬 교수의 민사소송법 그리고 와가쯔마 교수의 친족법강의를 신청해 들었다. 이분들은 모두 이 방면의 대가였고 훌륭한 책들을 쓴 분이지만 강의는 신통치 않았다. 자기의 저서를 가지고 나와 그저 읽기만 할뿐 이렇다 할 보충 설명이 별로 없었다. 와가쯔마 교수만은 멋진 강의를 하였는데 친족법이라는 과목 자체가 나에게는 흥미가 없었다.
이리하여 나는 강의에 별로 흥미가 없어지고 결국 이 대학에 출입하는 일 조차도 하기 싫었다. 이리하여 얼마 후부터는 둘이서 긴자나 신죽쿠 또는 아사쿠사 같은 데를 누비고 다니면서 맛있는 것이나 사먹고 영화구경을 하는 생활을 즐기며 살았다. 여름에는 동경에서 가까운 에노시마(江之島), 가나자와(金澤八景)등의 해수욕장을 당일치기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가을이 되자 9월 25일에 이선이는 딸을 생산하였다. 아파트 옆의 가꾸라자까에 있는 노나까병원에서 낳았는데 아침에 진통이 심하여 병원으로 걸어가던 중 하마터면 길가에서 애기를 낳을 뻔하였다. 이 애기가 바로 영채인데 처음에는 동경에서 낳았다고 해서 경자(京子)라고 불렀다. 그런데 일본의 난방시설은 매우 나빴으므로 애기를 낳은지 44일 만에 우리 셋은 평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런데 우리는 동경에 있는 동안에 매달 70엔(円)씩이나 하는 생활비를 썼다. 이렇게 돈을 많이 쓰면서도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딸만 하나 낳아가지고 왔다고 해서 이선에 대한 어머니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평생을 두고서 고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 동생 재숙이가 김광엽과 결혼하고 그 혼수를 실은 차가 연달아 이어 가자 평양 매일신문에서 기사로 날 정도로 난리를 치면서도 부모님은 나와 이선이의 결혼식은 제대로 올려주지 않으셨다. 이것은 이선에게 평생의 한이 되었다. 왜 부모님께서 이런 실수를 하셨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음 해(1941년) 3월에 나는 혼자 서울로 올라가 대학 졸업식에 참석하였다. 평소 나의 몸무게는 18관(67.5kg)이었는데 졸업식에 올 때 쯤의 몸무게는 22관(82.5Kg)으로 불어 있었다. 의학부 졸업생들은 나에게 뇌하수체에 고장이 났다고 놀려댔다. 결국 나는 결혼 때문에 공부는 하나도 하지 않고 그저 법학사 학위만 얻은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 결혼하는 것이 부모님의 당초의 희망이었으나 이선과 만났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신 부모님은 끝내 이선이를 좋아하지 않으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