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이 싸움은 다음날 강당까지 계속되었다. 전체 학생이 모인 자리에서 성토가 벌어진 것이다. 일본인 학생들은 차례로 단상에 올라 나의 행동이 조선일체의 총독부 정책에 어긋났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조선인 학생들은 이에 대하여 차별대우를 들어 맞섰다. 문제가 심각하게 확대된 것이다.
이러한 성토대회는 그 다음날도 계속 되었다. 그런데 후퍼라는 독일사람 교수가 우리들에게 몰래 귀띔해 주는데 현재 교수회가 열리고 있고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 각각 한명씩 퇴학시킴으로써 사태를 수습해 보려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양측의 대표자들은 당황하였고 이리하여 긴급히 대책을 세웠다. 이리하여 아라이와 내가 학생과장을 찾아 가기로 결론이 내려지고 우리 두 사람은 학생과로 가서 과장 앞에서 서로 악수 하면서 화해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 짖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학교 측에서도 퇴학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고 며칠간 계속되던 학내 소란은 진정 되었다.
그런데 이 돌발사건의 수습과정에서 조선인 학생들이 보여준 태도는 나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박병배 군은 그동안 학교에는 나오지도 않았고 그리고 다른 학생들은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크게 확대시켜 우선 자기들의 공로를 홍보하는 것만 급급할 뿐 정작 앞에 나서서 싸운 내가 희생될지도 모른다는 점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들의 이용물 노릇만 할 뿐이었다. 나는 크게 실망하여 이때부터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그만두고 대신 도서관에 파묻혀 책보는 데에만 전념키로 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나는 공산주의 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하였다. 평양에 있을 때에 읽다가 일시 중단한 것을 다시 계속한 것이다. 이 무렵 나는 하숙을 제기동에서 창신동으로 옮겼다. 경마장 못 미쳐 경성마육점(말고기집)이 있고 그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하숙집이 있는데 이 집에서 도시락 반찬으로 싸준 고기장조림이 사실은 말고기였음을 나는 곧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도시락 없이 등교하였다.
이때부터 나는 교과서나 공책, 잉크, 펜 등을 모두 교실의 책상 안에 갖다 놓고서 학교에는 언제나 빈손으로 다녔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책과 도서관이나 하숙집에서 보는 책이 모두 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습관이 되어 그때부터 나는 무엇이든지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다. 집에서 보는 책(공산주의 서적)도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습관이 길러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요즈음도 나는 아무것도 손에 들지 않고 강의실에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진 교수이지만 이런 버릇은 이미 19세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창신동에 있을 때에는 을류의 학생인 한병옥과 자주 만났다. 그는 설익은 유물론자였는데 가끔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유물론자이기 때문에 물질을 존중히 여긴다. 내가 지금 피우고 있는 이 담배는 물질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우리 집에 있는 식모를 희생 시킬지언정 이 담배를 버릴 수는 없다. 사람보다 담배를 더 중요시하는 것은 그것이 물질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중에 박헌영을 따라 평양으로 갔지만 해방 후에 이북으로 간 공산주의자들 중에는 이런 무리처럼 덜 익은 자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나는 약 1년 동안 더 열심히 공산주의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앙드레 지드의 책을 읽은 다음부터는 그 공부를 중단하였다. 사람을 자꾸 죽여야만 한다는 공산당원들의 태도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에 읽은 지드의 문장에 매료되어 나는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 보았고 그러다가 결국 나는 프랑스 문학에 빨려 들어가게 되었고 이 때가 21세였다.
나는 먼저 지드의 전원교향악, 미완성 고백 등을 읽었고 뒤이어 폴 발레리(Paul Valery), 보들레르(Baudelaire), 폴 베를렌(Paul Verlaine)으로 전전하다가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에 이르러 나는 미치고 말았다. 그의 시집인 지옥의 계절(Une Saison en Enfer)을 사서 가슴에 품고 다니면서 어디서든지 생각만 나면 꺼내 들고 소리 내어 읊었다. 또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율리시스(Ulysses)를 함부르크 판으로 구하여 탐독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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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의 지옥의 계절(Une Saison en Enf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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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예과 3학년 시절의 나는 아득한 환상의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프랑스의 쟝 콕도(Jean Cocteau)가 쓴 Opium은 더욱 더 이러한 나를 부채질하여 당시의 프랑스 문단과 예술계를 지배했던 초현실주의(Surréalisme)의 세계에 완전히 취해 있었다. 이리하여 그 해의 학교지인 ʻ청량ʼ에 나는 ʻ꿈에 본, 꿈에 본, 꿈에 본 꿈을 찾아서ʼ라는 괴상한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예과를 마치고 동숭동에 있는 학부로 올라가서도 계속해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는 이런 뜻을 평양에 계시는 선친께 알려 드렸으나 선친은 이에 적극 반대하시면서 법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다음 해 22세가 되던 3월초 대학에서 학부지원서를 배부 받았다. 해당되는 곳을 모두 기입하고 마지막 지원학과 부문만 남겨 놓고 문과와 법률학과 중에서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이때 문득 한 생각이 나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문과로 간다 해도 조선 사람인 이상 졸업 후에는 중학교 교사가 될 것이 뻔하고 또 법과로 가도 역시 군수나 판사, 검사가 되는 것이 고작이다.’
지금까지 내가 이상형으로 생각했던 인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내가 조선 사람이라는 현실을 생각하니 많은 불리한 조건이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어차피 내 뜻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면 차라리 부모님께 효도나 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서운한 감정을 억누르며 법률학과를 써냈다. 나 자신을 배신한 것 같은 심정이었다.
법문학부에는 법률학과, 문학과, 철학과, 사회학과의 네 학과가 있었는데 법률학과의 정원은 40명, 나머지 세 학과의 정원이 합해서 40명이었다. 그런데 예과 수료생중에서 50명이 법률학과를 지원하였으므로 이 학과만 다시 시험을 치렀다. 김봉관 군은 나를 따라 같이 몰려다니면서 환상의 세계에 빠져 있었고 그는 나처럼 진학문제를 가지고 부친과 의견 충돌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뜻대로 지원하였다.
나는 다행히 시험에 합격하여 그동안 프랑스문학에 미친듯이 심취해 있던 상태에서 벗어났다. 갑자기 돼지고기 비계를 씹는 심정으로 딱딱한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청량리를 떠나 동숭동 캠퍼스로 갔다. 3년 동안의 청량리 생활은 실로 배 고품과 자기도취의 광적인 삶이었다. 말고기 장조림 때문에 도시락 없이 다닌 탓에 점심은 항상 굶었고 그래도 공산주의와 프랑스 문학이 좋아 깊이 빠져들면서 많은 책을 읽으며 1년에 200권 정도의 책을 소화해 냈다. 어떻게 보면 수확이 많았던 3년간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