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제국대학 예과 입학 (21회)

서울에 올라온 나는 김봉관과 함께 제기동에 들었던 그 집을 하숙으로 정하였다. 이 집은 목노 술집이었지만 우리들은 그 집 안채에 있는 방에 들었다.

입학식이 끝나고 문과 갑류의 교실에 들어갔다. 갑류는 영어 전공이었고 을류는 독일어 전공이었다. 각각 정원이 40명이었는데 조선인 학생은 3분의 1인 13명을 넘지 못하였다.

담임 교수인 후지이교수가 들어와 인사를 하였다. 그때에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강조하였다,

“예과생은 과외독서를 많이 해야 하고 학교 공부는 낙제를 하지 않을 정도만 하면 된다.”

그런데 나중에 후지이교수의 이 말을 그대로 실천한 학생은 나 한 사람뿐이었다. 대학예과 3년 동안 나는 항상 꼴지로 진급하였으며 내 다음 순번의 학생은 언제나 낙제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공부는 제쳐 놓고 항상 이상한 책만 읽었던 것이다.

입학식이 끝난 다음부터 우리는 본정통인 충무로, 명치정(명동) 그리고 종로 뒷 골목의 술집에만 파묻혀 살았다. 어느 날 우리는 김봉관 군과 함께 창경원 벚꽃 구경을 갔다가 그 곳에서 여자 두 명을 사귀었는데 그 후부터 우리들은 서로 자주 만났다. 그러나 한 두 달 후부터는 그들을 오지 말라고 선언하였다. 얼굴이 그리 예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이러한 방식의 여자 교제를 우리는 그 후에도 여러 번 하였다. 잠시 만나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이내 몇 달을 넘기지 않고 더구나 공부에 부담이 될 정도가 되면 금세 교제를 그만두는 식이었다.

우리는 대학예과에 입학한 다음부터 머리를 깎지 않았고 또 세수나 목욕도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7월이 되어 방학을 맞아 평양으로 내려갈 쯤에는 머리가 어께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 몰골로 집에 들어가니 어머님께서는 기가 막혀 하셨다. 그러나 거리에 나가면 이곳의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부러운 눈초리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더욱 기세가 등등하여 노래를 부르면서 평양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9월이 되어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그런데 이때부터 같은 반에 있는 박병배(전 통일당 국회의원)군이 나에게 접근해 왔다. 그는 경성 제이고등보통학교(경복고교) 출신으로 대전이 고향이었다. 어려서부터 서울에 올라와 하숙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서울생활의 달인이었다. 그와 같이 매일 밀려다니면서 술을 마셨고 술값은 언제나 내가 지불하였다. 당시 일본말로 카모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그와 같이 마신 술값은 언제나 내가 냈으므로 결국 나는 그의 카모 역할만 했던 셈이다.

▲ 1924년 건립된 경성제국 대학 예과 건물(청량리 소재로 지금의 미주아파트 자리)

하루는 그가 서울에서 살려면 깍두기와 설농탕을 먹을 줄 알아야 하는데 너는 깍두기는 맵다고 못 먹고 설농탕은 노린내가 난다고 안 먹으니 서울 생활의 참 맛을 모른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다음부터 나는 깍두기와 설농탕을 먹도록 노력하였고 이제는 그것들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는데 과연 그의 말대로 이 두 음식은 바로 서울의 맛인 것이다.

하루는 박 군과 함께 서울 운동장에서 조선인 학교인 경성여고(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일본인 학교인 경성고녀(경성고등여학교)의 테니스 시합 결승전을 구경하게 되었다. 2대 2로 팽팽히 맞서다가 마지막 시합에서 승패를 가늠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인 학생의 체력이 갑자기 떨어져 그대로 시합을 계속한다면 조선인 학생이 승리할 것이 자명해 보였다. 그러자 갑자기 집행부에서 이 시합은 내일 속행 한다고 일방으로 선언 하고는 시합을 중단시키고 말았다. 스탠드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우리는 비겁하다며 시합을 계속하라고 외쳤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다음날도 우리는 아예 대학예과의 교기를 들고 운동장으로 가 열심히 여고 팀을 응원하였다. 그러나 시합은 일본 고녀팀이 이기고 시상식이 거행되었다. 작년의 우승 팀인 조선인 여고 측에서 우승기를 반환하고 고녀 측에 수여 될 때에 일본인들의 간교함에 격분한 우리 두 학생은 크게 소리 질렀다. 비겁한 술책으로 우승기를 빼앗겼으나 내년에는 꼭 찾아올 터이니 잘 보관해 두라고 떠들어 대자 장내는 조용해졌다. 그러니까 본부석에서 본부장이라는 자(당시 총독부 전매국장)가 우리 앞으로 다가와서 소리 질렀다.

자기가 우리의 대학 선배인데 할 말이 있으니 내려오라는 것이다. 일은 다소 커진 모양이나 우리는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장외로 나가면서 선배냐 심판이냐 분명히 하라며 비아냥거렸다. 그리고는 대학예과의 교가를 부르면서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다음날 학교에 나가니 박 군은 눈치를 챘음인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학교 수업이 끝난 다음 아라이라는 학생(동대문경찰서 고등계형사의 아들)이 나를 불러 무도관 뒤로 끌고 갔다. 거기에는 5, 6명의 일본인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경성운동장에서 취한 행동을 보니 정신을 좀 차려야겠다고 말하고는 망또를 나에게 뒤집어씌우고 한참동안 두들겨 팼다. 나는 대항하지 않고 그대로 맞기만 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인 학생들이 다음날 그 일본인 학생들을 무도관 뒤 같은 장소로 불러 모아 놓고는 다음과 같이 통고하였다. 여러 사람이 들러붙어 한 사람을 때린다는 것은 남자답지 못한 일이다. 한 사람씩 차례로 나와서 황 군과 다시 싸우라. 참으로 나에게는 뜻밖의 통고였지만 어쨌거나 나는 그들과 1대 1로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가네코라는 우리 반 학생이 나왔다. 나는 안경을 벗어서 옆에 있는 조선인 학생에게 주고는 그와 맞섰다. 가네코는 유도 선수였으므로 나는 그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맞섰다. 그러다가 기회를 보아 평양사람 특기인 박치기를 하였다. 그는 나가 떨어졌고 가네코 패라고 선언한 조선인 학생들은 다음 일본인 학생을 내 앞에 내다 세웠다. 그는 다른 반 학생이었으므로 나는 그의 이름을 알 수가 없지만 또 박치기로 그를 쓰러뜨렸다.

이렇게 해서 그 다음으로 아라이가 내 앞에 불려 나왔다. 그런데 그가 오른손에 단도를 숨기고 있다가 이것을 눈치 챈 우리 반의 문작지 군이 야구 방망이를 들고 나와 아라이의 오른 손을 내리쳤다. 단도는 땅에 떨어졌고 동시에 소동이 벌어졌다.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간에 집단난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때마침 학생과의 지도교수가 뛰어와서 우리들을 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