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회고록을 편집하면서
태어나면서부터 신동소리를 들으며 자란 아버님은 일제 말기의 식민체제하에서 시작한 유년기를 거쳐 청소년이 될 때까지 남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아버님은 8･15 해방, 대한민국 정부수립, 6･25 전쟁과 남북분단, 혹독한 피난시절과 서울수복, 가난과 정치적 혼돈 속에서의 민주화과정과 경제성장 등 이 나라 사람이기에 겪어야 하는 다사다난한 인생역정을 고스란히 경험하며 그 중심에 있었다. 그 중심에서 많은 일도 하셨다.
이렇게 남다른 삶을 살아온 아버님은 틈날 때마다 이 모든 사실들을 일기장에 적어놓으셨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는 이것들을 정리하여 손수 회고록(回顧錄)을 써서 남기셨다. 원래 나는 아버님 탄생 100주기를 맞이하여 이 회고록을 출판하는데 강력히 반대하던 입장이었다. 왜냐하면 아버님 특유의 솔직하고도 가식 없는 문장으로 써내려간 글 속에는 사소한 집안 내력은 물론 당시 아버님이 접촉한 많은 유명인사에 대한 평가와 정치적 소견들이 거침없이 표현되어있기 때문이다. 굳이 이런 부분까지 공개하며 출판할 필요가 있을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돌아가실 때의 아버님 나이를 훌쩍 넘어 이제 8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이 회고록을 다시 읽어보니 다양한 시대적 배경과 사건을 맞이할 때마다 대처한 아버님의 재치와 처사는 그 연령대에 가장 어울리는 최선의 삶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옛 성현의 말씀에 30에 입지(立志)하고 40에 불혹(不惑)하며 50에 지천명(知天命)하고 60에 이순(理順)하는 군자(君子)의 길을 정확하게 그리고 소신껏 밟았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다.
아버님은 그의 소신을 운명처럼 시작하게 된 법학을 통해 구현하려 하셨다. 그는 이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분야와 언어를 가리지 않은 독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백과사전(百科辭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박학다식하였다. 그런 그의 안목과 왕성한 연구로 아버님은 차곡차곡 법체계를 통한 정의구현을 추구하였고 수많은 책과 논문과 글들을 남겨놓으셨다. 원리에 맞지 않는 글이나 정부정책 등이 있다고 생각되면 가차 없이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인생의 절정기라고 하는 30~40대의 일이었다.
그리고 인생후기인 완숙기에 들어서면서는 실제로 정부에 몸담아 실전에 임하기도 하였다. 이론뿐 아니라 실전에서의 경험을 쌓기로 하고 김범부 선생님이 지어주신 석우(石隅)라는 호에 걸맞게 나라의 한 모퉁이에서 아낌없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부딪치는 사람도 많았고 체질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인물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이 또한 아버님 삶의 일부였음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지나놓고 보니 아버님의 이런 부분은 오히려 그분만의 매력이고 색깔이었던 것이다. 자식이라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여 사신 흔적을 은폐하거나 과장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집안 후손뿐만 아니라 다른 친지 분들과 그 느낌을 공유하는 것도 나쁠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 때 정비석 씨와의 필화사건은 서울신문에서 만우절의 깜짝 쇼로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일이었지만 두 분은 오히려 그 후 좋은 술친구가 되었다. 그 밖에 아버님은 한창 글로 좌충우돌하던 시기에 학술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대립된 의견으로 다투었던 몇 분이 있었다. 그리나 그 분들과도 지면(紙面)이나 소문과는 달리 사적으로는 여전히 친구였다. 그런 맥락으로 보자면 사사건건 부딪쳤던 유기천 교수와도 좋은 결말을 내릴 수 있었겠지만 끝내 두 분은 화해하지 못하였다. 일방적으로 용서는 할 수 있어도 화해는 쌍방이 하는 것이기 때문일까, 어쨌든 두 분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다.
아버님은 50대를 지나면서 특히 4개월의 옥고(獄苦)를 치르면서 ‘용서’라는 것을 배우셨다. 이는 아버님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이었다. 서로 나라사랑의 접근법이 다를 뿐 뜻을 같이 하지 않는다고 해서 미워할 것이 아니라는 관용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과감하게 인생관을 바꾸게 된 데에는 지혜로운 어머니의 역할이 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첫 눈에 반한 애인이자 밤새 이야기를 나누어도 지루하지 않는 단짝 친구였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지혜를 나누는 정신적인 동반자요 쌍방 후원자였다.
40대부터 시작하여 돌아가실 때가지 완성한 일련의 복귀사상(復歸思想)은 두 분의 공동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대에 삼성문고에서 포켓용으로 출판한 복귀(復歸)는 당시 젊은이들의 호주머니에 꽂혀있는 필독서라 할 정도였다. 갈 길을 잃은 젊은이들의 인생지침서로서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런 두 분의 신념은 아버님의 법철학 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아버님은 일찍이 젊은 시절에 정의구현을 위한 절대적인 법체계는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완벽한 제도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재국가가 존재하는 것은 법을 운용하는 정치인의 자질이 불순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고 이를 현대적 의미의 독재라고 하셨다. 완전한 제도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주먹은 여전히 가깝다는 논리다. 법이란 단지 법 운용자의 도구와 구실을 제공하는 역할만 할 뿐 정의구현의 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신 것이다.
법이란 제도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정치 속에서도 그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 아버님은 민강설(民强設)을 주장하기도 하셨다. 약소국로서의 입지를 벗어나려면 스스로 부강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법철학강의](四頂版)에서는 자동차에 비유하고 있다. 우리는 성능이 좋은 자동차를 제작하고 수시로 수리를 해서 필요할 때마다 잘 이용하면 되는 것처럼 정치, 경제, 사회적 면에서는 물론, 국민 하나하나가 민도를 높이고 살찌우는 것이 법의 정신을 살리는 길이라고 주장하신 것이다.
사람들의 곱지 못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잠시 정부에 몸담으신 것도 그의 이런 소신의 일환이었다. 정신적으로 이미 완숙기에 들기 시작한 이 시기에 별로 좋은 조건은 아니었지만 그간의 태도에서 벗어나 나라의 한 모퉁이에서 숨은 역할을 하기로 한 그 분의 용기에 어머니는 뜻을 같이 하기로 하셨다. 그 분의 입각(入閣)은 동조(同調)라기보다는 교정하고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위험한 줄다리기처럼 험악한 정치 분위기 속에서도 무엇보다 청백리(淸白吏)의 모범을 보이며 법의 악용을 막는 데에 전념하셨음을 회고록을 통해 잠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뇌물이 의심되는 선물을 들고 온 검사의 경우 오히려 한직으로 좌천되었다는 이야기가 법무부 안팎에 나돌 정도였다. 불순한 뇌물과 청탁은 이미 수문장(守門將) 노릇을 하던 비서실에서부터 차단되었다. 또한 아버님은 문교부 재직 시에도 이미 모든 조건을 갖추고 단지 형식적인 절차만 남아있던 매제(妹弟)의 교장발령을 철회한 적도 있다. 가까운 친척이라서 오히려 불이익을 얻은 셈이지만 고맙게도 나의 고모부께서는 서운해 하지 않았다.
이후로 아버님은 그의 복귀사상에서 지적하였듯이 훌륭한 아이디어와 능력을 갖추었어도 현실 조건에 맞지 않으면 조용히 물러나 수신(修身)에 전념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하셨다. 공자님께서 자신의 이상향을 구현할 인물을 찾아 주유천하에 실패하자 후학을 가르치는 것으로 정착하셨다면 아버님은 내면의 세계로 들어와 마음수련을 하기로 하신 것이다. 결코 이 나라를 포기할 수도 버릴 수도 없었던 그 분의 애국심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것으로 귀결된 것이다.
이렇게 내면의 세계로 들어와 자신을 닦는 것으로 방향전환하면서 아버님은 붓다의 가르침에 전념하셨다. 남기신 수많은 원고들을 정리해보니 원효대사에 관한 글들이 많았다. 이미 아버님은 삼현학, 여래장 등의 저서를 비롯하여 불교에 관련한 책들을 번역하면서 현대철학을 능가하는 불교이론을 확립하고 있었다. 이론 못지않게 실천을 중히 여겼던 아버님의 말년은 수도승과 같았다. 그래서인가 돌아가시기 4시간 전에는 죽음을 예고하는 글을 남기기도 하셨다. 동료였던 이한기 교수님은 아버님의 이런 마무리를 무척 부러워하셨다.
단조롭지 않게 구비구비 잘 자란 소나무를 보면 사람들은 정일품(正一品) 벼슬까지 주면서 그 웅장하고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칭송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격돌하는 시대를 살다 가신 거칠지만 고귀한 삶을 마치 정일품 소나무를 보듯 큰 시각으로 보아주시기 바란다. 한 쪽에 치우치거나 사건과 언어 한 구절만을 부각시켜서 본다면 그 분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많은 장점을 우리는 놓치게 된다.
아버님은 그의 천제적인 두뇌와 학구열로 항상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았고 스스로 답을 찾았다고 여기는 순간 곧바로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하셨다. 결코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삶을 사셨다. 편견 없이 열어놓은 마음으로 본다면 우리는 이 고목으로부터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님의 회고록은 읽으면 재미가 있다.
누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편찬한 동생 황영준의 고집과 노고에 오히려 감사한다. 그리고 한문이 많은 원래원고를 한글로 고치면서 컴퓨터에 옮기는 작업을 한 여동생 무궁화의 노고에도 감사한다. 한문에 약한 후손들이 읽기에 편할 것이다.
회고록을 정리하면서 큰 딸 황영채가 드리는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