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명 거역과 장관 직에서의 해임 (114회)
  제16장 공직생활4

사건 당일에 큰 실수를 한 김치열 내무는 이번 사태를 우발적인 것으로 넘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서울대의 당국자와 문교부에서는 이번 사태에 대한 해석이 달랐고 이처럼 내무부와 문교부의 사태평가가 달랐기 때문에 사태 수습에 많은 차질이 초래되었다.

실제로 내무부에서는 연행 학생 300여명 중 8명만을 구속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그리고 이번 사태의 책임을 윤천주 총장의 고압적인 자세에 돌리고 있었으며 이것은 학내에 먹혀들어가 앞으로 총장 배척운동으로 번지게 될 가능성을 내포하게 되었다. 윤 총장의 사표를 받으라고 하는 대통령의 생각은 이러한 배경을 두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번 사태의 처리 방안을 시간을 좀 두고서 깊이 생각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10월21일 나는 윤천주 총장과 점심을 하면서 학원대책을 협의하였다. 그러나 그날 오후 청와대의 안보회의에서는 학원사태를 수습할 능력이 문교부에 없다는 무책임한 보고가 중정으로 부터 있었다. 자기들의 잘못으로 인한 사태의 책임을 문교부로 떠맡기려는 것이다.

나는 중정에서 제대로 사태파악을 하고 있는가라고 김재규에게 따져 물었다. 그는 실무자의 보고일 뿐이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피할 뿐이었다. 이 때에 나는 장관 자리를 내놓게 될 것을 예감하였다.

10월25일에도 연세대생들의 대대적인 난동이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도시산업선교회의 목사들이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그런데 내무부와 중정은 배후자들을 색출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안이하게 기동대만 출동시켜 학생들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을 뿐이었다.

10월31일에는 이화여대에서도 터졌다. 정오에 채플시간이 끝나자 2,500명 가량의 학생이 자리를 뜨지 않고 유인물을 돌리면서 교가와 찬송가를 불렀다. 경찰은 학생 2명을 연행하였고 학교 측에서는 휴강조치를 하려고 하였으나 강력하게 만류하여 휴강을 못하도록 하였다.

11월 11일에는 서울대의 인문대생들이 주동이 되어 난동을 벌였다. 그런데 이날 밤 이리역에서 화약을 싣고 가던 열차가 폭발하여 역전과 시가지가 부서지는 큰 폭발사고가 발생하였다.

11월12일 아침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주재로 긴급회의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은 내가 서울대에 가서 만약 다시 데모하면 서울대 문을 닫겠다고 선언할 생각으로 대학 교수들을 소집시켜 놓았소. 그러나 나는 이제 곧 이리로 내려가야 하므로 황 장관이 내 대신 서울대에 가서 말 한대로 통고하시요. 내 말대로 한 자도 틀리지 않게 통고하시요.”

그 때의 대통령의 표정은 심하게 굳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찬 서리가 맻혀 있었다.

나는 곧 서울대로 향하였다. 이런 경우에 장관으로서는 서울대의 문을 닫는 것이 문교부의 방침이라고 통고하는 것이 대통령에 대한 예의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그리고 나의 마음의 고향이며 수십 년간 몸담았던 배움과 가르침의 터전이었던 서울대학을 쉽사리 문을 닫게 할 수가 없었다.  

▲ 박정희 대통령의 문교부 순시 때 업무보고를 하는 황산덕 장관 (매일경제신문 1977. 2.5)

나는 그냥 대통령의 명령을 제3자 입장에서 서울대 교수들에게 전갈하는 것으로 끝냈다. “대통령은 곧 이리로 가야 하므로 나는 그 분의 말씀을 대신 전하려 왔다.”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나중에 중정 측에서 이것을 가지고 시비를 걸어왔지만 그 때에 이미 나는 장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싫어져 곧 물러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각오하고 있었다.

10월 24일 요르단왕의 아우이며 국무총리인 핫산 왕세자가 다녀갔다. 요르단 서구지역의 개발 사업에 한국이 원조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11월 24일 주문진 옆에 새로 세워진 사임당교육원의 준공식 참석.

11월 25일 USIA의 신임원장 Dr. Lee가 인사차 내방하였다. 미국 대사관의 문화담당관이며 풀브라이트 재단의 위원장인 호이트 박사가 수행하였다. 문교부에는 국비로 많은 학생을 해외로 유학시킬 수 있는 자금을 가지고 있는데 그 돈을 풀브라이트재단에 내 놓으라고 그 는 강요하였다. 지금까지 풀 브라이트재단이 많은 한국 학생을 해외로 유학시킨 것에 대한 보답을 하라는 것이다. 나는 적당한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12월 9일 전주에서 새마을 지도자 대회가 있었다. 많은 장관들이 배석하였다. 내가 대통령과 대면한 것은 이 날이 마지막이었다. 세기의 인물인 박정희 대통령의 피곤한 얼굴을 마지막으로 대면하고 다시는 볼 기회가 없었다.

12월 17일 정기국회는 개회되었고 그리고 개각설이 떠돌았다. 나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다고 믿는 사람들이 나는 틀림없이 유임되리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김치열과 김재규의 태도로 보아 나는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12월 19일 저녁에 최 총리의 전화를 받고 삼청동 공관에 가서 메모 용지에 사표를 쓰고 왔다.

12월 20일 박찬현 씨가 후임으로 임명되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문교부에서는 박 씨가 누구인지 몰라 사방으로 문의하였다.

3년 반 동안의 나의 장관 재임은 끝났다. 나는 집에 돌아와 3일 밤낮으로 계속해서 잠을 잤다. 뒤에 대통령은 비서를 시켜 친서와 함께 1,000만원을 보내 주었고 그리고 1978년 3월 16일에는 정부에서 나에게 청조근정훈장을 수여하였다. 이것은 공무원에게 주는 최고훈장이다.

 
  성균관대 문제와 서울대 집회 (11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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