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한다는 뜻의 ‘추억’이라는 단어를 책 제목으로 쓰기에는 너무 진부하다. 더구나 회고록은 이미 추억을 함의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김준원 선생은 책 제목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라고 물었을 때 1초의 주저함도 없이 추억이라고 잘라 말했다. (책 제목 네이밍은 저자와 출판사 간 대화에 의해 정해지지만, 먼저 저자의 의사를 묻는 게 순서다.)
출판사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제목이었기에, 선생의 답변에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으나 생각해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회고록의 한 구절을 보자.
“내가 순옥을 처음 본 것은 강서고급중학교 1학년 때였다. 순옥은 그때 명진여자중학교 3학년이었다.
우리는 기차통학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내가 기양에서 기차를 타고 강선으로 가는데 순옥이 조양리(되꾸지)에서 보봉으로 들어서는 건널목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때 순옥은 한 손엔 책가방, 한 손엔 우산을 들고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청순하고 순결한 천사의 얼굴이었다. 정말 맑고 고운 여학생이었다. 그때부터 나의 가슴 속 깊이 순옥이 자리 잡았다.”
순정한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회고록, 추억을 관통하는 서사의 복선은 그리움과 사랑이다. 저자인 김준원 선생은 지금 순옥과 사랑을 나누고 있다. 그것은 기록의 동인(動因)이기도 하지만 현재 삶의 동력(動力)이다. 키엘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라고 했거니와, 김준원 선생이 여생을 활기차게 보내는 것은 사랑이라는 희망이 그 원천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첫 사랑이 회고록, 기록의 동인
83세(회고록을 출판할 당시의 나이)의 김준원은 열일곱 시절의 첫 사랑과 다시 사랑을 나누고 있다.
"1950년 5월 1일 강서고급중학교 3학년 때였다. 기숙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나는 그때 사감선생님을 모시고 기숙사위원회 간부 5명과 함께 대보산(大寶山)으로 등산을 갔다.
대보산 등산길은 신대평역에서 ‘너부놀’을 지나 안쪽으로 올라가는 길과 ‘구대평’을 지나 평남도로에서 내동으로 들어가는 두개의 길이 있다.
우리는 온갖 먹을 것을 준비해가지고 기양역(岐陽驛)에서 기차를 타고 대평역으로 가서 대보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정상은 편평한 지형으로 사방에 큰 산이 없어 진남포제련소 굴뚝이 뿌옇게 보였다.
내려오는 길에 우리는 산 중턱에 있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별장에 들러, 구경도 하고 쉬면서 안성결 선생으로부터 도산 선생에 대한 설명도 듣게 되었다. 그때 태성인민학교 여선생 2명이 학생들을 인솔해와 합류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여선생 중 한 명이 최순옥이었다.
강서중 때부터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순옥에 대한 연정을 품어 왔던 터라 순옥과의 조우는 반갑기도 했고, 한편 떨리기도 했다.
순옥은 나보다 한 학년 아래였는데, 여학생 중에서는 전교 1등을 하는 수재였다. 얼굴이 예쁜데다 성품도 얌전해서 선생님들한테는 칭찬을 받았고,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약학전문학교>인가 <의학전문학교>를 다닌 것으로 아는데 2학년 중퇴하고 태성인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것이다.
나는 그때다 싶어, 도산 안창호 선생 별장 대문 앞 꽃밭에서 빨간 홍도나무 꽃을 바라보며 순옥에게 내 마음을 고백하고 프러포즈를 했다. 그때 순옥은 기다렸다는 듯이 기꺼운 미소를 띠며 반갑게 받아주었다.
순옥은 학생들을 인솔해 먼저 대평역으로 내려갔고 우리는 차시간이 다 되어서야 뛰어 내려갔다. 순옥은 내가 뛰어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순옥 앞으로 가서 윗도리를 벗어 주었다. 순옥은 얼른 받아서 자기 손에 걸치고 모자까지 받아주었다. 우리들의 사랑은 여기서부터 눈으로 마음으로 행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왜 선생은 순옥을 그리워하고, 이제사 사랑을 나누고 있는가? 한국전쟁은 거창하게 말해서 민족의 비극이었지만, 개인들에게도 숱한 운명의 트라우마를 만들었다.
"6.25가 발발했다. 인민군 징병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던 날, 나는 그동안 쓴 일기책 2권을 가지고 맨 끝장에 ‘혈서로 사랑의 맹서를 남긴 두 권의 책’이라고 써서 순옥의 집으로 갔다. 순옥을 불러낸 나는 대문 앞에서 그 일기책을 전해주었다. 그 날의 만남이 순옥과의 마지막이 될 줄이야."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이 선생의 인생에 트라우마로 남아
그랬다. 중공군이 참전하고 유엔군과 국군이 후퇴하게 되며 상당수의 북한주민들은 월남을 택했다. 이때 피난자들은 지주 집안의 청년들이 많았는데, 이는 징집과 이념적으로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때 피난한 사람들은 지금과 같이 70년이 넘는 생이별이 될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잠시, 며칠 피했다가 돌아온다는 생각으로 떠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김준원과 최순옥은 그렇게 이별했다.
피난민 김준원은 휴전 4년 후인 1957년 결혼해 1남 2녀를 두었다. 남한에서 잠시 경찰관을 지냈지만 군납품 사업을 시작으로 사업가의 길로 들어서 레코드사를 차리기도 했고, 7, 80년대 부동산개발 붐이 일 때 강남에 부동산중개사무실을 차려 큰돈을 벌었다. 그러한 인생사에서 수많은 울고 웃는 일 또한 숱하게 겪었음은 물론이다.
아들 딸 다 키워서 출가시키고, 노년의 삶을 즐길 즈음 아내가 세상을 떴다. 생전, 선생은 아내와의 부부생활에 대해 행복하지 못했음을 솔직히 밝히고 있거니와 형과 단 둘이 월남한 처지로서는 아내와의 결혼은 마지못해 택했던 측면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부부생활의 불만이 북에 두고 온 순옥 때문이라고는 볼 수 없다. 쫓기듯 살아가는 세월 속에 한가하게 순옥만 생각하고 있을 겨를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저 가끔 한번 씩 생각나는 첫사랑의 추억이었을 뿐이다.)
열정을 불태웠던 시절을 보내고, 아내가 세상을 뜬 후의 삶을 스스로 독거노인이라고 칭하는 선생은 2000년대 들어서서 인지상정처럼 북에 두고 온 가족을 찾기로 결심한다.
용케 북에 있는 형과 동생과 연락이 닿았고, 그 가족을 통해 순옥의 주소도 알게 되었고 남편과 사별했다는 소식도 접한다. (사실 재미교포 등 북한과 남한을 자유롭게 드는 사람들에 의해 남과 북의 가족들이 편지왕래를 하는 것은 공공연한 일이다. 물론 그 중개업자에게 꽤 많은 비용을 줌은 물론이다) 이때부터 김준원 선생에게 꾹꾹 눌러 참았던 못다 이룬 사랑의 휴화산이 폭발한다.
60년이 흐른 후 나누는 사랑, 얄궂고 오묘한 운명....
그 스무 살 시절에 했던 순정하고 정열적인 사랑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이 서평을 읽는 사람들 중 그게 가능하느냐고 의문을 품겠지만,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니 현실이 영화를 뛰어넘는다. 북의 최순옥이 남의 김준원에게 보낸 답장을 하나 소개한다.
60년 전의 감회가 새롭게 떠오릅니다. 대보산의 도산 안창호 선생님 댁 마지막 편지에 나에게 당신의 사랑의 맹세가 담긴 책과 혈서 “우리의 사랑은 영원하리” 내 가슴은 흥분으로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철없던 그 시절 수집음만이 앞서 당신이 주는 그 사랑에 씨원한 대답 한번 주지 못한 것 이제 와서 후회가 막심합니다.
-중략-
60년 고이 간직하였던 그 마음 내 한생 남이 못 느끼는 사랑을 받은 행복한 인간입니다. 고마웠습니다. 2011년 내 나이 80세. 처녀 시절에 처음으로 당신한테 받은 “첫사랑” “값비싼 사랑”을 고이 간직하겠습니다.
2011. 5.20. 최순옥
위 서신은 초창기에 보낸 것이고, 현재 두 사람의 사랑은 더 많이 진전되어 있다.
'추억'은 김준원 선생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분량으로 치면 회고록의 15%남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사랑’을 서평의 대부분에 할애하고 이 회고록의 특징으로 뽑은 것이다.
묻는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돈? 권력? 명예?
아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 아닌가!
추억. 당신이 어떤 가치관을 가졌던 적어도 이 회고록을 읽으면서만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는 사랑이다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 회고록의 대부분의 서사는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많은 곡절과 파란만장한 것인가를 느낄 수 있는 스토리로 씨줄과 날줄로 짜여 져 있다는 점에서 수준 있는 회고록으로 엄선하는데 별로 손색이 없다. 그 중 두 가지를 부연한다면 첫째, 실향민의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북에 대한 김준원 선생의 증오는 상상 이상이다. 심지어는 북의 혈육마저도 빨갱이라고 반감을 보이는데, 오직 순옥만은 천사 같은 사람일 뿐이다. 둘째, 큰 사업가는 아니었지만 사는 동안 선생에게는 비교적 돈이 따랐는데, 그래서인지 몰라도 여러 번의 사기를 당했다는 것이다. 사기를 당하는 이야기에서 느낀 것은 사기꾼도 타고 나지만 사기를 당하는 사람도 팔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준원 회고록 '추억' | 투데이미디어출판사 2013. 2. 15.
ISBN | 978-89-961830-3-70 (03040).
페이지 442 | 판형 신국판
글 / 편집부
